재일동포 100년(7) 조총련 발족

입력 1999-11-16 14:16:00

현재 일본에 정주하는 70만 재일동포 가운데는 민단을 중심으로한 50여만명과 조총련 산하의 20여만명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숫자가 과거에는 양측으로 반반씩 분포돼 있기도 했었으나 근년들어 민단쪽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아직도 20여만명이라는 적지 않는 동포들이 조총련계에 소속돼 있으면서 그동안 반목과 마찰을 거듭해 오고 있었다. 최근들어 다양한 화합의 움직임이 일고 있기는 하지만 재일동포들은 이국땅에서까지 남북으로 갈려 분단조국의 비극을 직접 체험하며 살고 있다.

해방 직후 '재일 조선인 총연합회' 즉 조총련은 발족 당시부터 비정상적으로 생겨 났었다. 1945년 10월15일 그동안 동포들에 의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각 단체의 대표들은 대동단결의 필요성을 느끼고 전국적 조직인 '재일조선인 연맹(조련)'을 결성했다. 전국에서 5천여명이 참가한 첫날 모임에 이어 다음날인 16일에도 대회는 계속됐는데 개회 직전 좌익계 청년들이 회장에 난입, 참석 중인 민족파 지도자들을 구타, 폭행하고 4층에 감금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리고 좌파 및 그 동조자들로 임원진을 구성하고 공산주의자들이 실권을 장악해 버렸다. 그 배후에는 좌익계의 음모가 있었던 것이다.

당초에 '재일조선인 연맹'은 '총력을 집중하여 신조선 건설에 이바지 하고 일본 국민들과의 우의를 보전하며 재일동포의 생활안정, 귀환동포의 편의를 기도한다'고 선언했었다. 또한 해방된 독립국민으로서 긍지를 갖고 재일동포들을 계몽 통제하는 초당적인 자치단체로 발족한 조직이었다.

그러나 대회개최 5일전 정치범으로 복역중이던 일본 공산당 간부였던 김천해(金天海)가 출옥했고 그를 중심으로한 일파들이 조련의 실권을 탈취하기로 음모를 꾸며 이날 조직을 수중에 넣어 버린 것이다. 김천해는 일본공산당 재건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이 조직을 일본공산당의 충복으로 만들어 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과정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에 들어간 조련은 1948년 9월9일 북한에 공산정권이 수립되자 이를 즉각 지지하고 한반도 적화통일과 일본의 공산혁명을 목표로 삼고 민단과 날카롭게 대립했었다. 결국 1949년 소요사건을 일으키자 연합군 사령부의 명령으로 강제해산되고 김천해 등 간부 일행은 추방되고 말았다.

그후 남은 조직원들은 6.25전쟁을 계기로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으로 변신했다가 55년5월25일 북한의 지령으로 이 단체를 '재일조선인 총연합회' 즉 조총련으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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