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시론-도덕 불감증과 냉소주의(이창기.영남대교수 사회학)

입력 1999-07-23 00:00:00

최근 우리사회에는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희한한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 엄청난 옷값을 남보고 대신 내라고 하는가 하면, 현직 도지사 내외가 수억의 뇌물을 챙긴 혐의로 구속까지 되었는데 정작 본인들은 억울하다고 아우성이다. 흉악한 범죄인이 감옥을 탈출하여 2년 수개월 동안 전국을 누비며 수십차례의 강도와 절도행각을 벌이다 붙잡혔지만 생명의 위협까지 받으며 엄청난 재산을 강탈당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신고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죄인을 나무라는 목소리는 의외로 자그마하다. 죄인을 응징해야 할 당국자들은 어쩐 일인지 전전긍긍하는 빛이 역력하다. 이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표정에는 분노의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사회의 도덕적 불감증이 매우 위험한 수준에 와있음을 알려주는 경고신호가 아닌가 하여 매우 걱정스럽다. 엄청난 비리와 흉악한 범죄에 놀라고 분노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재능(?)에 감탄하고 이면에 숨겨진 일화를 은근히 즐기는 기미마저 감지되고 있다. 감추어진 것들을 노출시키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모두가 대리만족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모든 국민들이 온통 관음증에 감염된 공범자들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여기에는 우리 사회에 대한 극도의 냉소주의가 저변에 깔려 있다.

사람들은 사회의 부조리가 도저히 시정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세상을 냉소하고 그 사회로부터 등을 돌린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희망이 없는 이 세상이 무너지기를 은연중에 갈구하며, 누군가가 이 기원을 대신 실현시켜 주기를 기다리게 된다. 이러한 민심이반을 등에 업고 의적(義賊)이나 진인(眞人)을 자처하는 자가 등장하여 어리석은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미래나 내세를 약속하는 사이비 종교가 성행하고, 사람들은 비기(秘記)나 비결(秘訣)을 다룬 문서들에 관심을 가진다.

이러한 현상들은 사회의 모순이 극도로 심화되고 더 이상 희망을 가질 곳이 없다고 판단될 때 비온 후의 독버섯처럼 번져나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교훈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최근의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여러 징후들은 이들과 너무나 닮아 있다.

공직자가 비리를 저지르고 흉악범이 못된 짓을 했다는 것도 큰 문제이지만, 보다 더 심각한 것은 분노하기조차 포기한 우리 사회의 도덕적 불감증과 냉소주의이다. 시민들은 더 이상 지도층에 희망을 갖지 않는다. 지도층들이 시시각각 말을 바꾸며 밥그릇 싸움에만 몰두하고 사치와 낭비에 탐닉하는 동안 비리는 관례라는 이름으로 점점 더 견고한 구조를 구축해 가고 있다. 이 거대한 비리구조 앞에서 시민들은 절망한다. 그만큼 민심은 오늘의 지도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지도층은 이러한 민심의 흐름을 직시해야 한다. 민심이 무너지면 천하가 무너진다는 고금의 진리를 가슴 속에 새기며, 대오각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급옷 로비사건, 도지사 부부의 수뢰사건, 탈옥수 신창원의 사건 등등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눈이 정작 주시하고 있는 것은 지도층의 행태임을 알아야 한다. 냉소하고 있는 듯 하지만 속으로 이글거리며 불타고 있는 시민들의 눈빛이 그대들에게는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존재임을 이제는 깨달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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