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직.염색등 유기적 협조만이 살길

입력 1998-12-24 00:00:00

권순원 대구패션조합 이사장은 "밀라노에 올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고 기운이 빠진다"고 했다. 밀라노는 되는데 대구는 왜 안되느냐는 생각에 가위 눌리기 때문이다. 이번 밀라노 방문단에 참가한 다른 섬유단체 대표도 비슷한 언급을 했다.

사실 밀라노와 밀라노 주변 지역 섬유업체의 시설은 대구지역 업체의 설비와 비교해도 크게 나을게 없었다. 더 낡은 시설도 적지 않았다. 밀라노의 강점은 감각과 장인정신, 혁신적인 유통시스템,밀라노 섬유인들의 단결된 힘이었다. 물론 원사, 제직, 염색, 패션등 각 스트림간 유기적인 협조시스템도 본받을만 했다. 그러나 시스템은 대구 섬유인들이 단결하고 정부가 지원만 하면 언제든극복할 수 있는 과제다.

문제는 역사문화적 전통에서 나오는 감각과 장인정신에서 비롯된 기술력의 차이다. 이길환 삼성물산 밀라노지사장은 이와 관련, "이 상태로 계속 가면 백년 뒤 대구가 현재의 밀라노는 될 수있어도 3년 뒤 밀라노는 천년이 가도 못따라간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것은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없는 과제다. 여기서 밀라노 프로젝트를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추진해야 할지 답이 나온다.

지금처럼 기계설비만 도입한다고 밀라노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결국 사람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밀라노의 시스템중 우리가 흡수할 것은 받아들여 기반구축부터 서둘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상누각이 될 것이다.

하지만 밀라노 프로젝트의 추진상황을 보면 거꾸로 가는 느낌이 없지않다. 현재 문희갑대구시장은 어패럴산업을 밀라노프로젝트의 중점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패션어패럴 산업이 고부가가치 산업이고 섬유산업의 꽃인 것은 분명하다.

대구섬유산업의 구조개선을 위해서도 패션어패럴 산업은 육성돼야 하는 당면과제다. 그러나 급하다고 바늘허리에 실을 꿸 수는 없다. 밀라노방문단에 참가했던 경일대 박명애, 영남대 이연순교수는 "대구시가 너무 앞서가는 감이 없지않다"며 "학계와 업계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거쳐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패럴 산업육성을 위한 고급 봉제인력 확보도 관건이다. 그러나 숙련된 봉제인력이 대구에는 없다. 체루티1881의 봉제공장 히트만사 종업원의 평균 근무경력은 20~25년이었다. 한국의 숙련된 봉제인력이 낮은 임금을 감수할 지도 의문이다. 홍콩의 봉제회사들도 중국 봉제공들의 노임이 최근급상승하자 광둥성 지역에서 철수, 필리핀.베트남.라오스.미얀마.방글라데시 등지로 속속 봉제공장이전을 추진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어패럴산업 이전에 소재산업부터 궤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대구시 관계자들은 어패럴 산업을 육성하면 소재산업은 자연 따라오게 돼있다고 역설한다. 로로 피아나와 함께 이탈리아 최대 모직업체인 제냐의 경우 제직으로 명성을 얻고서야 신사복 사업에 진출했다.

그러나 제냐는 신사복 제조에 뛰어들고도 7년간이나 제냐 자체 브랜드를 붙이지 않았다. 이유는처음 만들어 미숙한 신사복에 제냐 브랜드를 붙일 경우 제직에서 얻은 기존 제냐의 명성에 먹칠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베르사체 여성복 봉제공장을 둘러본 박동준씨도 "디자이너는 소재에서 영감을 얻는다"면서 "베르사체의 옷감을 보는 순간 영감이 떠올랐다"고 밝혔다. 어패럴 밸리 건설론자인 대구대 금영철 교수는 이와 관련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일 뿐"이라고 소재산업 육성론을 일축하고 있다.

그러나 금교수의 이러한 논리는 대구 섬유산업의 현실을 너무 간과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여성의류사업에 진출해있는 대구 모 직물업체의 경우 자체 생산한 직물을 사용하는 비율은고작 10~20%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80~90%는 모두 수입원단. 이는 대량생산체제에 익숙한 지역 직물업체들이 의류업체의다품종 소량주문에 제대로 응하지 않는 이유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원단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 등 선진국 시장은 천연소재 중심이다. 이 때문에 합섬위주인 대구 직물업체들은 패션어패럴 산업육성론에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있다.

물론 합섬이라고 선진국 시장에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밀라노의 일급 브랜드 프라다의 경우고급 합섬소재를 사용, 습기가 많은 지역인 일본.홍콩 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있다. 하지만 일본도 고부가 의류용 신합섬을 개발했으나 세계시장에서의 한정된 수요때문에 최근엔 산업용섬유 개발로 눈을 돌리고 있다. 합섬으로 만든 옷을 팔 수 있는 선진국 시장은 유럽에선 영국 뿐이며 나머지 지역도 미국.일본.홍콩이 고작이다.

따라서 어패럴 산업육성을 위해선 밀라노와 함께 세계 중저가 의류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영국 어패럴 산업도 벤치마킹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밀라노의 경우 부틱 개념의 하이패션 위주지만 영국은 어패럴 개념의 브랜드가 위세를 떨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경우 막스 스펜서 그룹(세계시장 점유율 60%)과 버튼 그룹(점유율 30%)이 홍콩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OEM방식으로옷을 만들고 있다.

특히 대구직물업계는 텍스타일 디자인 개념이 없다. OEM방식에 익숙한 대구 직물업계로서는 텍스타일 디자인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바이어의 주문대로 원단을 짜주기만 한 대구 직물업체가 텍스타일 디자이너를 둘 리 만무하다.

하지만 밀라노의 2만8천개 직물회사는 최소 한 명이상의 텍스타일 디자이너를 두고 의류업계와긴밀히 디자인을 협의하고 있었다. 최대 모직물 업체의 하나인 로로 피아나는 8명의 텍스타일 디자이너를 두고 있었다.

직물업체들은 자사의 텍스타일 디자인외에 꼬모에 집중적으로 몰려있는 2백여개의 텍스타일 디자인 스튜디오를 통해서도 디자인을 입수하고 있었다.

지역 소재산업중 염색가공분야는 더욱 취약하다. 폴리에스테르 감량가공 기술은 중국.인도네시아등 후발국에 추격당하고 있다. 반면 몇몇 선진 업체를 제외하면 교직물 염색기술조차 제대로 습득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신섬유인 텐슬(영국서 개발한 고강력 레이온 섬유) 염색가공은 2, 3개 대구업체가 3년전부터 시도하고 있으나 균일한 품질을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꼬모의 염색공장 띠파스를 방문한 함정웅 염색기술연구소 이사장은 "텐슬 가공업체 대표가 와서 보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며텐슬 염색가공기술 부족을 시인했다.

봉제와 소재산업외에도 패션어패럴 산업육성의 전제조건은 많다. 디자이너 브랜드 육성도 과제중하나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육성해놓으면 그에 따른 부수효과는 엄청나다. 디자이너 브랜드 외에 다른 브랜드의 성가도 함께 올라가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 준코 등 몇몇 디자이너를 육성하기 위해 국가차원의 엄청난 지원을 했다. 일본 패션이 세계 패션시장에서 명함이나마 내밀게 된 것도 이러한 지원 덕분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대구시 차원의 지원도 쉽지않다는 것이 고민이다. 이와 함께 전시회.콜렉션.유통시스템 등 섬유인프라도 밀라노서 벤치마킹해야 할 부분이다.

특히 밀라노의 원사.제직.염색.패션 등 각 스트림간의 유기적 협조체제 구축은 인상적이었다. 디자이너가 제직업체의 텍스타일 디자이너는 물론 염색업체.원사업체와도 긴밀히 협조하고 있었다. 반면 대구 섬유산업은 각 스트림간의 정보교환조차 제대로 안되고 있으며 각 스트림내에서도 기술개발은 도외시한 채 과당경쟁으로 덤핑을 일삼고 있다.

밀라노를 방문한 지역 업계.학계 대표들은 모두 "변해야 산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생각을 묶어줄 그릇은 여전히 마련되지 않고 있다. 문시장은 밀라노 방문후 "밀라노 프로젝트를추진할 태스크 포스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대구시의 향후 계획에 따라 밀라노 프로젝트의 성패가 달려있다는 점에서 어떤 그림이 그려질 지 주목되는 시점이다.

〈曺永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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