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의 세상읽기-슬픈 우리 '해저드'

입력 1998-09-01 14:55:00

오래간 만에 만나게 된 고향 친구 셋과 술을 마셨다. 나는 그 중의 한 친구에게 30년전에빚을 진 일이 있는데 그날 그 자리는 바로 내가 그 친구에게 빚을 갚되 공개적으로 갚는 자리이기도 했다. 빚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빚도 한 30년 묵은 빚 갚는 일은, 채권자는 물론 채무자조차도 기분좋게 만드는 법인가?

술자리가 끝나면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는가? 나는 그것이 늘 궁금한데 한 친구는 한숨을 쉬며 음주운전하다 걸려 면허 정지를 먹었다고 했다. 택시를 타고 가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되겠다 싶었다. 또 한 친구는, 취하면 자동차를 두고 가겠다고 했다. 정말 그럴수 있느냐고했더니 그럴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러기로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나머지 친구는, 자기는 자동차를 몰고 왔고 또 몰고 가야 하는 만큼 마시지 않겠다고 했다. 또한 좋겠다 싶어서우리는 옛 이야기를 나누면서 밤이 이슥해지도록 노닥거렸다. 잘잘못은 다 잊자, 미숙했던시절 일은 다 잊자 하면서 마셨다.

대취하도록 마신것은 아니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초저녁부터 밤이 이슥해지기까지 계속된 술자리였다. 취한 내가 취한 눈으로 보아서 그런가? 모두가 거나해지지 않았나 싶다.면허정지 먹은 친구는 택시를 잡아타고 갔다. 안마시겠다던 친구는 자동차 문을 열면서, 자기는 전혀 마시지 않았다고 했다. 분명히 마신것 같았는데 전혀 마시지 않았다고 우겼다. 그리고는 자동차 문을 땄다. 술 취하면 자동차를 두고 가겠다던 친구는, 자기는 전혀 취하지않았다고 했다. 분명히 취했을 터인데도 전혀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자동차 문을 땄다. 내게는 앞의 친구가 술을 마셨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내게는 뒤의 친구가 술에 취해 있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라는 말이 자주 사람들 입을 오르내린다. 도덕적으로 '풀어져 있다', 도덕적 긴장이 '느즈러져 있다'는 뜻일 터이다. '해저드(hazard)'가 무엇인가? '해저드'는 주사위 놀이를 뜻하는 중세 프랑스어에서 나온 말. '운에 맡기고 한번 해본다'는 뜻이니,'해저드'는 '도박'일 수 있겠다.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긴급한 일이 생기면 우리는 비상등을켜는데, 이 비상등은 영어의 '해저들라이트'를 번역한 말이다. 독자들은 골프 선수 박세리가양말을 벗고 개울로 들어가 공을 쳐내던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골프에서는 이런 개울을 '워터 해저드'라고 부른다. '해저드'는 그러면 '장애물'이기도 하겠다. 어떤 장애물인가? '도랑창'이다. '도랑+시궁창'이다. 그러면 '해저드'는 결국 무엇인가? '느즈러진 상태에서 운에맡기고 한번 해보다가 도랑창에 처박힌다'는 뜻을 품는 말이겠다.

과연 '도덕적 해이'인가? 도덕적으로 긴장해보지 못한 시대에 '해이'라는 말은 당치 않다.지금은 우리의 도덕적 긴장이 느즈러져 있는 시대가 아니다. 새로운 도덕적 긴장이 조성되어 본 적이 없는 시대, 어떻게 조성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시대다. 이제 그것을 조성해야하는데, 조성해야 한다는 그 생각 때문에 나는 술자리 뒤끝이 쓸쓸했던 것이다. 하나는 마시지 않았다고 우겼고, 또 하나는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해서 쓸쓸했던 것이다. 꼭 손바닥으로하늘 가리는 것 같아서 쓸쓸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쓸쓸함의 시작이었다.그렇게 돌아서서 역으로 갔다. 막차는 지나간지 오래라고 했다. 세 시간만 있으면 첫차가 온다고 했다. 세 시간 쉬자고 호텔에 들것이 없어서 값싼 여관에 들었다. 친구들이여, 나는 나를 방으로 안내한 직후에 포르노 비디오를 틀어준 여관 종업원의 뺨을 때려주지 못했다. 아직도 그 모양인 역전 여관에서의 쓸쓸함을 나는 견딜수 없었다. 우리 사는데가 온통 '도랑창'이다. 30년 묵은 빚을 청산하는 날, 여전히 우리가 허우적거리던 도랑창에서의 서글픔이여. '오, 도미네 논 숨 디그누스(주님, 우리 인간들, 이 모양입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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