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역 제2금융의 역사는 1907년부터 시작된다. 이해 5월 지방금융조합 규칙이 발포돼 설치된지방금융조합이 그것.
지방소농민의 금융이용을 돕고 농업개발을 촉진시키기위해 설립된 금융조합은 규칙발포 7개월만인 12월말까지 전국에 10개조합이 설립됐다. 경북지역에는 경주, 상주, 성주등 3개지역에 조합이문을 열었다.
지방금융조합은 1년전 설립된 농공은행의 보조기관으로 설립돼 사업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긴했지만 기구면의 개선이 따르지못했다.
또 도시 중소상공업자에대한 금융지원이 미미한 실정이어서 당시 상공인의 주류를 이루던 일본인들의 원성을 샀다. 또 농민에대한 여신지원도 오래못가 한계에 부딪쳐 수탈의 원천인 농업의 진전도 더이상 기대하기 어렵게 되고말았다.
이에 일제는 1918년 도시금융조합의 설치를 허용하고 각도단위로 연합회를 설치하는 조치를 취한다.
지방금융조합과 도시금융조합이 소속된 도단위 금융조합연합회는 입지여건에 따라 예금이 남아도는 조합과 대출수요가 많은 조합을 연결시켜 자금의 과부족현상을 해결해나가는 기능을 수행하게됐다.
도시금융조합은 1918년 대구와 김천, 1920년 포항, 1922년 상주, 1923년 대구서부등 5개소가 설립됐다.
만주사변 발발 2년뒤인 1933년 일제는 각도 금융조합연합회를 해체하고 조선금융조합연합회를 탄생시킨다. 금융조합의 중앙집중체제는 식민지수탈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었다.협동조합 본래의 목적에 역행하는 이같은 체제는 해방이후 금융조합제도가 종언을 고하는 날까지계속됐다. 해방직전 경북의 금융조합은 본소가 70개, 지소 25개, 산업조합 1개소였다.지금은 형태를 찾아볼 수 없는 무진회사는 1922년 첫선을 보인다. 경북지방 최초의 무진회사는이해 11월 설립된 대구무진회사.
무진업은 서민층의 상호금융을 주로 취급하는 특수금융업 형태이다. 우리나라에서 일찍이성행했던 계와 비슷한 성질을 지닌 무진업은 1910년 일본으로부터 도입된 이후 1922년 무진업법이 제정공포되면서 본격발전된다.
대구무진 창설 한달후인 1922년12월 김천무진이, 다음해 1월 대구에 대팔무진이 창설됐다. 또1923년10월에는 포항무진이, 다음해 6월에는 대구에 조양무진이 설립됐다.
난립상을 보이던 무진회사들은 1938년1월말 일제의 전시통제책의 일환으로 경북무진으로 통합된다.
또 1942년8월에는 현 한일은행의 전신인 조선중앙무진이 경북무진을 흡수한다. 경북무진을 마지막으로 전국의 모든 무진회사가 조선중앙무진에 흡수돼 무진회사도 이때부터는 단일체제로 운영된다.
조선중앙무진은 경북무진 흡수 3개월뒤 기존의 대구, 김천, 포항지점외에 경주와 안동에도 지점을개설해 해방직전까지 경북지역에는 무진회사 지점이 5개소가 있었다.
한편 대구에 어음교환소가 설립된 것은 1921년7월이며 같은해 교환건수는 하루평균 1백10매꼴인연간 약4만매였다. 또 다음해에는 교환건수가 전국의 6.1%%인 9만2천매로 늘어 대구경북지방의상거래비중이 지금보다 훨씬 높았음을 보여주고있다.
〈池國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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