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탐방-시민 선정 대구 10대 명소중 하나 향교

입력 1996-11-28 14:01:00

시민이 뽑은 대구의 10대명소 중의 하나인 대구향교.

은은한 묵향에 젖어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는 곳이다. 옛 선현을 찾아 과거와 현재와의 이야기실타래를 풀어보는 것도 적잖은 즐거움이라라.

향교는 지방민의 풍속을 교화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 성현 제향(祭享)도 주요기능이다.대구시 중구 남산동 아미산자락에 위치한 대구향교는 2천2백여평의 대지위에 향교의 근간인 대성전(大成殿.성현위패 봉안)과 명륜당(明倫堂.강당)을 양축으로 그 앞에 동.서무, 동.서재(東.西齋.기숙사)가 배치됐다.

정원을 사이에 두고 양사재(養士齋.연구실)와 낙육재(樂育齋.연구실겸 도서관)가 대성전과 명륜당을 마주보는 공간배치를 보여준다.

당초 대구향교는 1398년(태조 7년) 중구 교동에 건립됐던 것이 임란때 소실돼 달성공원에 이전건립됐다. 그러나 뱀, 도마뱀 같은 파충류가 많이 나와 불길한징조인데다 학업에 지장이 많았다는것. 이후 다시 교동으로 이전, 4백여년을 지속하다가 일제시대에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자 일제가화장장이던 아미산쪽으옮기고 독립운동기운을 꺽으려고 동.서재, 동.서무, 낙육재, 양사재 등 4채는 허물어버렸다.

해방후 현재의 위치로 옮겨와 지난 90.91년 동.서재, 낙육재, 양사재 등을 복원했다.외삼문(外三門)으로 향교내로 들어서면 "왜 이제야 왔느냐"는 듯 중국 북경박물관의 공자상이 맞이한다.

바로 앞으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전통정원 양식을 살린 우리식 뜰이 전국향교가운데 유일하게 꾸며져있다.

이 뜰에 금강산, 백두산, 지리산 등 오악(五岳)을 상징하는 5개의 바윗돌과 천.지.인 3재(才)를 뜻하는 삼산(三山)의 거석 3개가 세워져있다. 또 대성전 앞뜰에는 2개의 바윗돌로 음.양의 조화를상징했다.

이 오악과 삼산의 사이에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한 돌연못인 오상지(五常池)를 조성, 깊게 고였다가 긴 돌물대를 통해 아래 돌연못으로 흘러간다.

정원하나에도 유교문화와 음양의 조화, 인간삶의 수레바퀴와 자연의 생태를 그대로 살린 선조의지혜를 엿볼 수 있다.

서편 담장쪽 뜰 가에는 경상감사의 업적을 기리는 공덕비 28기가 일렬로 줄지어서 있다. 으스러지고 퇴색해 연대를 알 수 없는 것도 많아 세월의 풍상을 말해주는 듯하다.

내삼문을 열고 대성전에 들어서면 중앙 제일 안쪽에는 공자의 위패가 있고 바로 앞 중앙에는 중국4성인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이 위패 동.서 좌우에는 최치원, 설총, 퇴계 등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대성전 앞의 좌.우 건물은 동.서무로 1948년까지는 우리나라 18현을 모셨으나 현재는 서고와 제수용품 보관창고로 쓰이고 있다.

대성전 바로 옆에 위치한 명륜당은 유림들이 모여 학문과 도의를 연마하던 강당으로 쓰였다.지방문화를 살찌게 했던 영남낙육재는 1721년 대구에 설립된 관립도서관의 효시로 유생을 선발,장학급을 지급하는 등 학문연구에 큰 공적을 남긴 곳. 이 낙육재는 독서, 시, 부(賦)의 창작 등 연구의 기능을 가진 공간이나 문묘나 사묘(祀廟)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양사재는 향내의 유생을 선발하여 기숙케하고 강학하던 연구실격이며 향교에서 향시(鄕試)를 치를 때는 과거장소로 쓰이던 곳이다.

지난해 건립된 외삼문 옆의 유림회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5백석규모의 대강당과 3백50석의소강당을 갖춰 각 문중총회나 학술회의 등을 치를 수 있고 국제회의장으로도 손색이 없다.향교에서는 일반인과 학생을 상대로 각종 교화사업과 강좌, 전통혼례를 치르고 있다.지난해까지만 해도 매년 6백여쌍이 혼례를 치뤘으나 예식업이 신고제로 바뀌면서 조금씩 줄기시작, 올해는 4백여쌍을 넘지 못할 전망이다. 과거에는 국제결혼이나 재혼자들이 많이 찾았으나 이제는 일반인도 많이 선호한다는 것. 우억기 재단 이사장은 "전통혼례중 신부만 두번 절하는 것을두고 남존여비사상 아니냐, 북쪽을 향해 두번 절하는 것은 사대주의 사상이 아니냐는 항의를 많이 받았다"며 음.양의 의미를 설명하면 수긍하곤 했다고 전했다. 〈李春洙기자〉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