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도안현에서처럼 버마 만다레에서도 위안소는 단 한군데뿐이었다. 내기억에 그곳 주둔 일본군부대는 버마파견 8400부대 사단사령부였으며, 멀지않은 곳에 마루사라는 부대도 있었다.나는 이곳에서 창씨성인 후미하라를 그대로 사용했고 이름은 요시코로 불리었다.
대개 아침식사를 한후아홉시쯤부터 군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방문앞에는 늘상 군인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여자가 상대하는군인이 하루에 수십명씩은 됐다. 참으로 인간으로선 견디기 어려운 나날이었다. 졸병들이 오후 4시쯤 부대로 돌아가면 6시쯤부터는 장교들이 와서 밤10시정도까지 있었으며, 그시간이후로는 긴밤손님이 왔는데 대부분 장교들이었다.
하루는 어떤 군인이 내방에 왔는데 자기는 조선인으로 마루사부대에 있다면서 그 부대의 50여명 군인중 30~40명이 조선인이라고 했다. 그이후로는 조선인 군인들도 종종 찾아왔다.
위안소에 오는 군인들은 모두 군표를 사용했다. 갈색의 요금표인 군표는졸병이 1원50전, 하사관 2원, 장교 2원50전 등으로 계급이 높을수록 많았다.중국에서처럼 관리인이 군표를 관리했다.
만다레에서는 한 7~8개월 머물렀던것 같다. 그러다 위안소가 속해있었던사단사령부가 아키아부라는 곳으로 이동을 하게돼 우리들도 군용트럭을 타고부대를 따라갔다. 섬이 많은 황토색의 바다를 다이하츠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가기도 했다. 전쟁이한창 심하던 때라 미군비행기의 공습이 잦았다. 그럴때마다 우리는 아무 섬에나 내려 몸을 숨겨야했다. 때로 일본군들이 주둔한 섬에 내리면 군인들이 벌떼처럼 우리를 에워싸곤했다. 상부에서 명령하면우리는 일주일이고 보름이고 섬에 머물러야만 했다.
아키아부에서는 1년가까이 살았다. 위안소에는 일본인과 중국인위안부들도있었는데 거처는 각기 떨어져 있었다. 내가 있던 곳은 조선인여자들만 있었으며, 주로 병사나 하사관들이 드나들었다. 일본인위안부들은 주로 장교들을상대했고 기생출신이 많았다. 위안소의 생활은 만다레때와 별다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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