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반계유형원 하-"세습타파"…노비제 폐지 첫 역설

입력 1995-04-27 08:00:00

유형원은 날 때부터 등에 북두칠성 모양의 검은 점을 지니고 있었으며 천성이 인자하고 기개가 담대하여 여러가지 일화를 남기고 있다.열다섯밖에 안된 소년 유형원이 호란을 피해가다가 도적떼를 만나자 "누구에겐들 부모가 없으리오. 너희들은 우리 부모를 놀라게 하지말고 마음대로 물건을 가져가라"고 호통쳤던 일이며 전라도 부안군 우반동에 자리잡은 뒤 사람들이 미신을 믿자 이웃에 있는 고목을 베어버리는 등 미신타파에도 앞장섰다.우반동 근처의 아름다운 산과 들로 거닐기를 좋아하며 1만권의 장서속에 파묻혀 산 그의 개혁사상은 토지제도를 비롯하여 관제, 군제, 교육및 과거제도,노비제도등 사회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펼쳐졌다.'백성들의 생활이 편하고 괴롭기는 수령에게 달렸고, 수령이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은 감사에게 달려 있는데, 지금의 감사는 임기가1년밖에 되지 않아직무를 충실히 이행하려해도 시간적인 여유가 없고 분분하게 자주 바뀌어서상하가 서로 연결되지 못해 위급한 일이 있어도 명령을 행할 수가 없으니 감사의 임기를 길게 하고 가족과 함께 부임할 수 있도록 하여야한다'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대목도 있으나 유형원이 반계수록에 쓴 관료제도개혁론의 핵심은 지방관청의 수령이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고 소신껏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임기를 넉넉하게 잡으라는 뜻을 담고 있다.율곡 이이의 관료제도 개혁론을 빌어 '감사의 임기 1년, 수령의 임기 3년은 임지의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기에도 턱없이 짧을뿐 아니라 책임행정을 실천할 수 없다'고 지적한 반계는 감사의 임기를 6년, 수령의 임기를 9년으로 연장하라고 주장했다.

"반계는 중앙집권적인 조선왕조가 지방관의 분권화 현상을 막기위해 임기를 짧게 하고 임지에 부임할 때 가족을 데리고 가는 것도 금지한 것 때문에 지방행정이 침체된다고 파악, 지방관들의 임기를 늘리고 그들이 가족을 동반하여부임할 수 있게해야한다고 주장했다"고 강만길교수(고려대, 사학자)는 '한국의 실학사상'에서 밝혔다.

반계는 나라에서 관리를 자주 바꾸는 바람에 그들이 선정을 펴기보다 벼슬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는 현실을 파악, 지방관의 임기연장설과 함께 외직(지방 벼슬)을 훌륭하게 수행한 사람을 경직(중앙 벼슬)에 중용해야한다고 주장했으며 비변사의 폐지, 제조및 겸직의 폐지, 내수사를 비롯한 궁중관계 관아의축소등 대폭적인 관제 간소화안을 제시했다.

그는 병역 개혁안으로군포법을 폐지하고 의무병제로 환원하여 병역의무자에게는 반드시 토지를 지급할 것을 강조했다. 농부 한사람이 1경의 공전(국유지)을 경작하여 그중 15분의 1을 세금으로 바치고 4경을 단위로 4명의 농부중 1명만 병역을 부담하고 기타 일체의 부담은 전부 폐지해야한다고 역설했다.원래 조선사회에는 특수한 일부 양반을 제외하고는 전국민이 병역을 부담하도록 규정됐으나 그대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이미 임진왜란 이전부터 병제가부패되기 시작, 병역 적령자들이 입영하는 대신 매년 한사람당 면포 2필, 즉 '군포'를 바쳤다. 병역의 대가가 면포이기 때문에 면포에 '보병'(보병), '여정'(여정)이라는 명칭까지 따라다니게 되었다.

"유명무실한 병역의 인원수가 늘어가면 그만큼 정부의 면포수입이 늘어가는것이나 양반, 호족들은 병역으로부터 면제되고 오직 빈곤한 백성들만 과중한군포를 부담할 뿐이어서반계의 군포폐지론은 백성들에게는 거대한 이익의 옹호였다'(최익한, '실학파와 정다산"중)

유형원의 군역 개혁론은 균전제를 내용으로 한 토지공전제 실시를 선결조건으로 하고 있어서 당시 지배계층에 의해 공전제가 거부되자 군역개혁론도 빛을보지 못하고 말았다.

반계의 탁견은 토지, 관료, 병역개혁에 이어 과거제도개혁으로 이어진다. 주자학과 함께 조선왕조를 받치던 두개의 기둥중 하나인 과거제도가 문란해져 능력중심의 인재등용법이 되지 못하고 관직 세습을위한 도구로 전락하자 그는과거제도를 완전히 폐지하고 학교교육을 통하여 능력있는 사람을 관리로 등용하자는 '공거제'(공거제)를 들고 나왔다.

우선 서울에 설치한 태학(태학), 도에 설치한 당학(당학), 군현에 설치한 읍학(읍학)이 소학 중학 대학과 같은 교과과정상의 단계를 이루게 하여 읍학과정을 이수한 사람 가운데 추천된 우수한 사람이 당학에 진학할 수 있으며 당학과정을 이수하고 선발된 사람만이 태학에 입학할 수 있게하여 태학과정을 마친사람을 해마다 35명씩 정부에 추천하여 진사가 되게하고 이들을 일정한 기간동안 진사원(진사원)에 수용하였다가 재질에 따라 관리로 기용하자는 것이었다.강만길교수는 "읍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사대부의 자제에게만 한정짓지말고 서얼출신과 양민의 자제도 입학할 수 있게 규정, 사대부 계급에 의한 관직 세습화를 배격하고 인재등용의 기준을 문벌보다 개인의 능력에 우선하였다"는 점을 반계의 교육개혁과 인재등용의 특징으로 꼽았다.

노비제도에 대한 유형원의 태도도 그를 투철한 실학사상가로 분류짓는 기준이 된다. 그 이전에도 노비제도의 불합리성과 폐단에 관심을 나타낸 사람들이있지만 노비제도 자체를폐지하여야한다는 사상가는 그가 최초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는 기본적으로 노비제도를 폐지하고 돈벌이를 위해 일정기간 주인과 계약을 맺고 노동이나 기술을 바치는 고공(고공)제도로 대체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노비를 없애는 문제가 당시 사회체제상 당장에 실현될 수있는 성질은 아니었으므로 우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첫 단계로서 노비신분의세습법을 뿌리뽑고 그것마저 실천되지 않을 경우는 노비신분의 종모법(종모법)을 따라야한다는 것이다.

노비제도의 폐지와 노비는 어미의 신분을 따르게 하는 종모법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종모법 실시문제는 현실적으로 수용가능해서 '반계수록'을 저술한지 약 70년후에 법적으로 확정되었다.

그가 노비제도를 폐지하여야한다는 생각을 가졌으면서도 결국 종모법의 실시를 제의하였고, 또 그것이 용납된 것은 실학자들의 선구적인 사상체계가 당시집권층에 의하여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한계를 뚜렷이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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