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홍칼럼-{평화공원}에 서서

입력 1993-11-16 08:00:00

나는 이번 일본에 갈때 1937년 나고야 엑스포 당시의 기념 안내책자를 가지고 갔는데 그 책에 실린 나고야의 명소들은 거의 다 파괴, 변형, 재건되었음을 알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나고야 이서를 견제하기 위해 세웠던 나고야성은 이차대전 때 폭격으로 거의 다 타서 재건되었다. 나고야시의 거의 전부가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었다 한다.**나고야의 무명총**

새로 도시계획을 하여 폐허 위에 건설을 했기 때문에 도로가 넓고 도시는 잘정비되어 있다. 많은 사람이 단시일에 죽었기 때문에 맨먼저 묘지조성이 시급했다. 그것이 지금의 {평화공원}이다. 나고야는 이 평화공원을 기점으로 하고 중심으로 하여 재건되었다. 대구시의 대명동만큼이나 큰 이 공원은 나고야시민들의 가족 묘지이지만 거기서 가장 큰 무덤은 누가 누군지 분간이 안된유해들이 묻힌 무명총이다. 폭격으로 가족을 잃었으나 유해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이 무덤에 와서 헌화한다. 평화공원의 가장 높은 언덕에는 평화당이라는 탑모양 건물이 있고 그 안에는 중국 남경의 어느 절에서 보내온 오백년 된목조 불상이 모셔져 있다. 외국의 불상을 나고야시의 혼으로 모시고 친선과평화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평화를 절감하고 이를 호소하고 후손들에게 얼마나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것은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의 평화공원들에 가면 볼수있다.원자탄의 피폭 중심지에 만든 이들 평화공원은 중등학교 수학여행의 필수코스에 들어있다. 선생님들이 열심히 열심히 평화를 일러주고 있는 광경을 보노라면 일본은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것 같다.

**8삽시간에 폐허로**

히로시마역에서 {평화돔}행 전차를 타면 원폭폭발 바로 아래에 있던 건물의원형지붕 가까이에 이르게 된다. 산업장려관이던 이 건물은 견고하여 그 잔해가 아직도 남아 당시의 참상을 말해주고 있다. 철근은 녹거나 굽어내려있다.1945년 8월6일 오전8시경 한개의 원폭이 히로시마 상공에 투하되었다. TeI초후 지상 6백m 상공에서 폭발, 작열했고 불덩이와 구름기둥이 마침내 버섯모양이 되어 1만7천m 상공까지 치솟았다. 사람은 물론 모든 물체와 건물들이 폭풍에 날렸고 열선과 방사선에 의해 파괴되었다. 반경 2킬로미터의 시가지가 삽시간에 폐허가 되었고 1백만인이 피해를 입었고 10만명이 죽었고 10만명이 중상을 입었다. 당시 화상을 입었던 정도는 붉게 익은 피부로부터 새까만 숯덩이가 된것까지 5등급이 있었는데 그 사진들이 평화공원의 평화기념자료관에전시되어 있다. 어떤 벽은 열선을 맞아 녹아내렸으나 사람그림자의 자리는 녹지 않고 남아있다. 그 사람이 타서 숯이 되면서 열선을 흡수했기 때문이다.**전쟁교훈 되새겨야**

나를 히로시마로 초대했던 히로시마대학의 한 교수는 어렸을 때 히로시마상공의 원자탄이 낸 섬광을 보았노라고 하면서 변두리에 살았기 때문에 피해를면했던 사정을 들려 주었다. 자기는 국민학교 학생이었기 때문에 피폭자의구제에 동원되지는 않았으나 동원되었던 사람들은 이차적 방사능피폭으로 아직도 고생하고 있다고 하면서 히로시마대학 근처의 적십자 병원을 가리켰다.히로시마 출신의 시인 하라 다미키는 비록 자신의 피폭은 가벼웠으나 고향땅의 괴멸을 비관하여 {먼 날 돌에 새겼거니/모래에 그림자 짓고/무너져 내린천지 복판/한 바퀴 꽃의 환}이라는 시를 남기고 철도자살을 했다. 그 시비 앞에는 모 고교2년생 일동의 1993년8월5일자의 열렬한 {평화선언}이 놓여 있었다. 8월6일자 히로시마 시장의 절규와도 같은 평화선언에는 {지금도 한반도등에서는 핵무기를 둘러싼 불투명성이 세계에 불안을 안겨주고 있다}는 구절이 있다.

겨레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북한! 민족의 자살 장치에 불과한 핵무기를 왜만들자는 건지? 전쟁을 치르고서야 평화가 좋은줄을 안다면 어리석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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