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다방과 동격이 된 시절
왕비, 60년대·80년대 다방문화 가교
10월로 접어들면 햇살의 입사각이 달라진다. 칼질에 따라 음식 물성이 달라지듯 계절도 그렇다. 하늘에 머물던 습기도 거의 말라버린다. 구름이 설 자리가 없다. 애국가 3절의 서두,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없이'의 심도가 그대로 전해진다. 그 삽삽하고 냉랭한 심사의 끝자락을 절묘하게 건드리는 예술가가 있다. 그가 바로 '시인'(詩人)이다. 그래서 그럴까, 11월 1일은 '시의 날'. 아무튼, 그 시절 시인들은 집이 있으나 마나였다. 다들 다방에 '짱박혀' 있었다. 시인이 다방과 동격이 된 시절인 탓이리라. 그 언저리에서 '시인다방'의 추억은 낭만의 속도로 무럭무럭 자라났다. 시인다방은 '예술치외법권구역'이었다. 시인에게 기행은 작품만큼이나 소중했다. 하나의 '멋'으로 통용됐다. '형용사의 가을'이란 시를 적은 이재행은 '폭압적 기행'으로 신출귀몰했다. 지금 같으면 문제가 됐을 수도 있는 일인데도 당시는 '시인이니깐'이라며 넘어갔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으로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장정일, 그의 뮤즈이기도 했던 박기영은 중앙파출소 옆에 있었던 심지다방을 축으로 야성의 원형질을 좇아다녔다. 그 옆에는 늘 시인다방이 '호위무사'로 엄호했다.
◆왕비다방과 김춘수
"왕비, 정확한 이름은 커피숍 왕비. 2층에 기성세대, 어둡고 칙칙한 3층은 20대 청춘. 2층을 통과해야 3층이 나온다"
소설가 박일문의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당선작 '왕비를 아십니까?'의 초입부이다. 훗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장편소설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박일문은 본영당 서점 옆 왕비다방 3층에서 그 소설을 구상했다.
왕비는 60년대와 80년대 다방문화의 가교였다. 50~60년대 유명했던 예술가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던 고풍스런 다방들도 고급 시설을 앞세운 세련된 젊은이 취향의 다방군에 밀려 하나둘 자취를 감추게 된다. 갈 곳이 마땅찮았던 예인들을 향해 왕비가 러브콜을 보낸 것이다. 그 축은 김춘수였다. 그는 마담과 여종원을 '장미'로 봤다. 그만의 연심(戀心)이 시심(詩心)으로 싹틔운 공간이었다. '가고파'의 작사자 노산 이은상도 대구에 오면 여기서 사람을 자주 만났다.
1996년 파동에서 한정식당을 오픈한 김옥주 사장이 왕비의 산파역이다. 1976년쯤 도산 직전의 호다방을 인수해 왕비로 재탄생시켰다. 레이디 퍼스트 원칙을 고수했다. 비슷한 또래의 손님이 들어오면 여성한테 먼저 주문하고 커피도 여성한테 먼저 주었다. 제대로 대접 받고 있지 못하는 여성들을 최고를 모신다는 취지로 다방 이름까지 '왕비'로 정했다. 커피잔도 좀 특별난 걸로 구입했다. 남성용은 좀 투박한데 비해 여성용은 당시 최고급 커피잔으로 평가받고 있던 행남자기 브랜드로 정했다.
2층은 늙은 손님들, 3층은 대학생 등 젊은이들의 공간이었다. 왕비의 전통은 1979년쯤 대백에서 중앙파출소로 가는 길 오른편 아세아 다방으로 옮겨간다. 2년 정도 머물다가 1981년쯤 대백에서 동아양봉원 가는 길에 있었던 클래식 전문 다방 '예전'으로 이동한다.
◆심지로 달려간 시인들
1980년대 대구는 '시의 벙커'였다. 동인지 활동하던 진보적 시인들의 거점은 다방이었다. 코리아백화점 옆 '왕비', 대구백화점 옆 '유경', 동성로 은하·아세아·맥향·심지 등지로 분산돼 포진하기 시작한다. 왕비·유경에는 나이든 시인, 아세아에는 룸펜스타일의 시인, 예술지상주의파들은 중앙파출소 옆 '심지', 그리고 '올림푸스' 등으로 모여들었다. 원래 60년대 생겨 히피문화의 산실이었던 서울 명동에 있었던 심지(1972년 폐업)의 기운이 대구로 틈입한 것이다. 1978년쯤 박덕규, 박기영, 박상봉, 권태현 등 59년생 지역 문학청년들이 모여 결성한 오구(烏口) 동인들도 심지로 모여든다. 부산의 이산하, 훗날 영화평론가로 더 잘 알려진 하재봉, 서울에선 명상서적 전문 출판가로 잘 알려진 류시화, 그리고 이문재, '입속의 검은 혀'란 시집로 잘 알려진 기형도 등이 마치 성지순례코스처럼 심지를 거쳐갔다. 연이어 장정일, 이인화, 안도현, 구광본, 이정하 등도 소문을 듣고 거기로 모여든다. 1983년 4월 박기영·장정일·안도현·박상봉·권태현·김상윤이 심지에서 국시동인을 결성한다.
그 시절 심지는 삶의 행로를 찾지 못한 지역 문학청년들에겐 '해방구'였다. 광장은 탄압받고, 대신 골목문화가 활기를 띨 수밖에 없었다. 각종 시동인지가 '자유의 바람'을 몰고 온다. '자유시', '형상', '오늘의 시, 자연시, '국시' 등이 질경이처럼 태동한다. 1980년 어름 시청 옆에 있다 바로 사라진 대안 복합문화공간이었던 '분도소극장'과도 연동된다. 심지는 정식 허가받은 업소가 아니었다. 지하 주차장 한켠을 막아 다방으로 불법개조했다. 한낮에도 심지는 어두컴컴했다. 일반 손님들이 그곳을 좋아할 리 만무했지만 혈기방장한 문인들에게 적격이었다. 박기영은 그곳을 그리스 신하에 등장하는 지하세계 '하데스'로 명명했다. 그곳에 가면 주인 몰래 공짜 커피를 주는 덧니 난 20대 초반의 레지 이양이 그들을 살갑게 대해주었다. 하지만 바뀐 주인이 그들의 열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심지파들은 거처를 옮긴다. 2000년쯤 취재를 위해 심지를 찾은 날의 기억이 새롭다. 그 자리에는 협성교육재단측이 신축중인 지하 1층 지상 11층 높이의 우봉빌딩이 우람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대구 시인다방 연대기
요즘 전국적 가맹점으로 연결된 시 전문 독립서점 '산아래 시' 북토크 행사를 리드하고 있는 박상봉도 한때 '시인다방파'였다. 어머니한테 급전을 받아 보증금 500만원, 월세 25만원 조건으로 그 공간을 얻는다. 그렇게 해서 문화공간 '시인'(중구 봉산동 30의 1)이 태동한다.
배용균 감독의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젊은 스님 역으로 나온 신원섭, 조감독 강충구도 단골이었다. 당시 기자였던 이하석도 병풍처럼 후배 문인들을 감싸주었다. 동성로 길 중간에서 박상봉을 만난 그는 시인다방이 문 닫기 직전이란 말을 듣고 직접 액자까지 만들어주면서 이기철, 이성복, 이태수 등을 동원 '확인될 수 없는 시화전'이란 제목의 10인 시화전까지 진두지휘했다.
장정일은 온종일 시인다방 출입문 앞자리를 독점, 바둑에 매몰됐다. 시인이란 간판만 보고 다 방에 들어온 일반 손님들은 기원인 줄 알고 그만 밖으로 나갈 정도였다. 박상봉은 애써 손님을 잡지 않았다.
◆남은 건 빚 700만원
시인다방 1년 만에 남은 건 빚 700만원이었다. 박상봉은 이 바닥을 뜨려고 했는데 "그건 인생 실패를 의미한다"면서 박기영 등 선·후배들이 앞장서 시인다방 살리기에 열을 올리는 걸 보고 다시 힘을 낸다.
그런 연유로 1986년 5월 당시 한미은행 맞은편 골목 2층에 60여석 규모의 문화동 시인다방(중구 문화동 10의 53)시대가 열린 것이다. 조금은 엉성하지만 정성 가득한 '주간시인'도 발간했다. 1987년 '홀로서기 1'로 베스트셀러작가로 급부상 중이던 서정윤도 기웃거렸다.
하지만 시인다방은 양분되고 만다. 박상봉이 시인다방 시인의 식구 회장이었던 박인수에게 넘기고 1988년 상경했다. 한 언저리에 2개의 시인다방. 옥에 티였다. 박상봉이 떠난 시인다방은 예전 같지 않았다. 박인수도 시인다방을 포기하고 말았다. 철공소 사장이던 허남기, 마지막엔 계명대 철학과 출신 김은희가 전통찻집 스타일로 시인다방 명맥을 이어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1999년쯤 불이 나 소장된 절반의 책이 불타 없어지면서 시인다방도 추억의 뒷장으로 밀려난다.
그 와중에 박상봉은 89년 10월 중앙초등 맞은편에 '그리운 시인'을 열어 팸플릿형 소식지 '괴로운 시인'도 발간하고 1990년부터 안도현, 문형렬, 박연소 등을 초청해 '시인과 독자와의 만남'을 약 20차례 꾸려나가다가 21세기 문턱을 넘지 못하고 문닫고 만다.
◆마메종을 아시나요
그 흐름을 잘 흡수한 두 카페가 있었다. 바로 '두레'와 '마메종'(뒤에 나무노래). 두레는 김지하 시인이 무척 아끼던 곳이다. 특히 마메종은 '문화카페'나 마찬가지였다. 1983년 대구시 중구 동산양봉원에서 동인호텔 가는 중간에서 태어난다. 당시 카페 상호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영어로 갈 때 그 카페는 프랑스어를 앞세운다. 바로 '마메종'. 우리말로 옮기면 '나의 집' .
가난했던 소설가 장정일은 허구한 날 외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의리가 있었다. 김수영 문학상을 받자, 즉각 육필 사인이 들어간 시집 사이에 외상값이 든 편지봉투를 집어넣어 정 사장에게 건넨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마메종의 무서운 아이였던 이재행은 툭 하면 싸움질에 돈 구걸을 일삼았다. 그런데 그가 뇌출혈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신문보도를 접한 한 단골이 그를 위해 50만원을 쾌척, 그를 위한 모금운동이 이 카페에서 전개됐다. 배용균 감독도 마메종을 지독히 사랑했다. 그의 영화 '검으나 땅, 희나 백성' 촬영 장소 중 하나로 마메종을 집어넣었다. 소설가 이문열은 여기서 대취하면 늘 '잠수타기에 안성맞춤인 술집'이라고 좋아했다. 생태학적 무정부주의자인 영남대 박홍규 교수도 마메종을 거점으로 특유의 독설을 난사했다. 하지만 마메종은 추억카페였다. '주점카페' 시대를 넘지 못한다. 두산오거리 근처로 옮겨 '나무노래'로 복귀했지만 버티지 못하고 사라진다.
낭만성이 '댓글리즘'에 압사해버리고 있는 시절인 것 같다. 그래서 열어 본, 조금은 짠하고 아련한 가치가 나름 귀한 대접을 받던 시절의 '훈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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