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복장을 한 군인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쓰러졌다. 대륙 침략의 꿈을 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은 왜군의 솜씨였다. 조총을 든 왜군을 활과 칼만으로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오합지졸이 된 조선군에게 15만 대군을 막아낼 방법은 없었다.
◆ 붉은 옷의 구세주
1592년 4월 22일, 이 소식을 들은 곽재우가 일어섰다. 과거에서 낙방한 뒤 벼슬길을 접고 은거하겠다고 다짐한 지 3년 만이었다. 처음부터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몰아내자는 그의 외침에 응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재산을 내놓고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렇게 그의 곁에 모인 사람은 점차 늘어 2천 명에 이르렀다.
의병들은 쓰러진 관군을 대신해 칼을 쥐었다. 선봉에 선 곽재우는 붉은 옷을 입고 '홍의장군'이 돼 전장을 누볐다. 의령과 현풍, 진주 일대까지 세력을 넓히며 왜군의 진격을 막고 백성들을 보호했다.
그는 홀로 적진에 들어가 위장전을 벌이거나 적의 뒤를 노리는 매복을 즐겼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고장이었기에 지형을 활용한 전술은 누구보다 익숙했다. 결국 왜군은 그의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힘을 잃고 물러섰다. 그를 칭송하는 시에는 '왜군을 노루 쫓듯 한다'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 화려함 대신 청렴함
곽재우는 왜군을 물리친 공으로 조정의 부름을 여러 차례 받았다. 하지만 당쟁에 휘말리며 한자리에서 오래 일하지 못했고, 인생 대부분을 산골에 은거하며 보냈다.
그의 삶을 닮은 듯 조용한 곳에 장군의 흔적이 있다. 달성군 구례마을 한쪽에 자리한 '예연서원'이다. 곽재우와 그의 재증손 곽준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여름을 맞아 잔디가 제법 높게 자랐지만,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흐트러뜨리지는 못했다. 사당 내부는 들여다볼 수 없지만 강당과 마당은 둘러볼 수 있다. 마당 곳곳에 자란 꽃나무가 사당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이곳에는 귀가 솔깃해지는 전설도 전해진다. 서원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세워진 거대한 신도비에 얽힌 이야기다. 곽재우가 죽어서도 나라를 걱정해 큰일이 닥치기 전에 비석이 땀을 흘린다고 알려졌다. 6.25전쟁과 1983년 버마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당시에도 비석에 땀이 맺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서원에서 차로 20분가량 이동하면 곽재우 장군의 묘도 볼 수 있다. 도보로 찾아가기에는 거리가 있어 차량을 이용하는 편이 좋다. 선산에는 곽재우의 가족들이 함께 잠들어 있고, 그의 생애와 공적을 소개하는 작은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여러 봉분 가운데 유독 높이가 낮은 묘가 눈에 들어온다. 낮은 봉분 위 잔디는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정리돼 있었다. 이곳이 곽재우의 묘다.
얼핏 초라해 보이는 모습은 장군의 유언을 따른 것이다. 죽거든 구덩이에 묻기만 하고 묘비도 세우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나라가 혼란한 상황에서 자신의 공을 기념하기 위해 크고 화려한 묘를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의 청렴한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 도심 속 애국의 흔적
달성군의 서원과 묘를 직접 찾기 어렵다면 도심 가까이에서도 곽재우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그의 호를 딴 '망우당공원'이다. 공원에 들어서면 위풍당당한 모습의 곽재우 장군 동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붉은 옷을 입고 전장을 누볐던 홍의장군의 기세가 그대로 느껴진다.
공원에는 그의 호를 딴 망우당기념관도 자리하고 있다. 기록 속에 남은 장군의 초상화가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 밖에도 곽재우 장군의 친필 서신과 전장에서의 기록을 만날 수 있다.
망우당공원에는 곽재우 장군의 흔적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서슴없이 일어섰던 이들의 역사도 함께 남아 있다. 항일운동기념탑부터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을 기리는 비까지 자리하고 있다.
공원을 한 바퀴 천천히 걷다 보면 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을 내놓았던 이들의 역사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망우당 곽재우의 발자취를 따라 걷기 시작한 길이 시대를 넘어, 나라를 지킨 이들의 역사로 이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