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호기우타〉(壽歌,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윤혜숙 연출)는 희곡작가 기타무라 소(北村想)가 1979년 일본 나고야에서 초연한 작품이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축복의 노래'가 된다. 극 후반 극 중 인물 교코가 "안개 자욱한 아침은 하얗고, 넘실대는 빛은 노랗네. 젖은 풀은 푸르지. 나아가는 당신의 그림자는 무슨 색일까? 기다리는 나 노래하네, 호기우타∼"라고 부르는 노래 제목이다. 당시 일본은 오일쇼크 이후의 경제 불안과 냉전 시대 핵전쟁의 위협, 원자력에 대한 공포가 사회 전반을 뒤덮고 있었다. 기타무라 소(北村想)는 이러한 시대적 불안 속에서 핵전쟁 이후 신마저 저버린 황폐한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을 썼다. 방사능 낙진이 눈처럼 흩날리는 이미지로 폐허가 된 세상(무대)을 시각화하고, 예수를 연상시키는 야스오를 등장시켜 종교와 구원마저 희화화하며 핵전쟁 이후 문명의 붕괴와 인간 존재, 종교적 구원에 대한 절망을 우화적 블랙코미디와 부조리극 형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핵전쟁 이후, 신(神)도 구원할 수 없는 세상
유랑극단 단원으로 전국을 다니다가 두 사람만 남겨진 유랑극단 단장의 딸인 교코(여자, 정다연 분 )에 비해 한참 나이가 많아 보이는 유랑배우 출신 게사쿠(남자, 이경민 분)를 아저씨라고 부르며 두 인물은 그 누구도 살지 않는, 혹은 희망의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떠난다. 불꽃놀이처럼 미사일과 수소폭탄이 날아가고 떨어지는 폭음이 꽝꽝 울려대는 불꽃놀이 폭죽처럼 들리는데도 두려움은 안 보이고 "저걸 뭐한다고 불꽃놀이 질이여" 하며 쏘아대다가도 장소팔·고춘자처럼 일본 전통의 만담과 사설을 늘어놓으며 때로는 일본 전통가요를 악극 형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절망의 시대에 풍자적인 웃음과 만담 사설 같은 노래로 대응하며 야스오(우범진 분)라는 자칭 예수도 만나게 되고, 야스오는 세상 구원을 다 할 것 같은 종교적 설교를 우스꽝스럽게 늘어놓으며 교코는 이 야스오를 마음에 두기도 한다.
'반딧불이' 장면에서는 교코가 길을 떠나면서도 시신처럼 누워 있다가 다시 깨어나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주기도 하는데, 마치 핵전쟁 이후 방사능으로 오염된 인간의 삶이 죽음과 일상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감각되기도 한다. <호기우타〉의 특징적인 장면은 세 가지이다. 교코의 임신, 게사쿠의 죽음과 부활, 야스오가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교코와 게사쿠는 고대 멸망의 도시 모헨조다로로 떠나는 마지막 장면 정도다. 교코는 인과관계를 넘어서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수천 마리의 반딧불이들이 자궁으로 들어가 임신하게 되는데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반딧불이라고 가정한다면, 핵전쟁 이후 폐허가 된 멸망의 땅에서 아기 예수가 부활하는 것처럼 인간 생명이 단절된 폐허의 세계에 새로운 생명으로 인한 구원의 희망을 열어두기도 한다. 하지만 만약 반딧불이가 아닌 작가가 암시한 것처럼 방사능에 빛나는 다른 물질(아마가쓰)이라면 핵전쟁 이후의 문명은 자연과 인간마저 오염된 절망과 종말의 세계이다. 작가는 구원될 수 없는 종말적 세계에 의미를 둔 것 같다.
생명의 빛인 반딧불이와 방사능의 빛을 의도적으로 겹쳐 놓으며 핵전쟁 이후의 세계를 아름다움과 죽음,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역설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자연은 더 이상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땅이 아니라 방사능에 오염된 문명의 잔해로, 인간 또한 그 폐허 속에서 희망과 절망 사이를 떠도는 존재이다. 게사쿠가 죽었다가 다시 등장하는 장면은 부활의 종교적 의미를 강조하기보다 핵전쟁 이후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진 세계(교코가 죽은 듯하다가 다시 깨어나는 것 처럼)를 우화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읽는 것이 적절한 것 같다.
◇일본 초연 47년 한국 초연 27년 만에 다시 노래하는 <호기우타>
이 작품은 초연 20년 뒤인 1999년 세기말 서울공연예술제 해외 초청작으로 문예회관 대극장(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 적이 있다. 당시 기타무라 소(北村想)가 극단 프로젝트 나비(일본)와 함께 직접 연출해 무대에 올렸다. 1999년 10월호 『한국연극』에 게재된 평론가 김문환 선생의 리뷰를 보면 "작품은 구체성을 띠기보다는 추상성을 띠면서 인생의 부조리한 측면을 조명한다고 할까. 눈발이 흩날리는 마지막 장면을 꾸미는데 상당한 노력을 한 것 같고, 극적 구성은 전반적으로 짜임새가 덜하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한국 공연에서는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 것 같다. 당시 리뷰와 기모노 차림으로 손수레를 끌고 등장한 극 중 인물들의 사진만으로도 당시 무대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호기우타〉가 초연된 1979년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1945) 이후 34년이 지난 시점이다. 당시 기타무라 소는 원폭의 기억과 냉전 시대 핵전쟁의 공포를 바탕으로 핵전쟁 이후의 근미래를 상상하며 절망과 우울, 불안에 휩싸인 세상 풍경과 인간의 삶을 우화적으로 그려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원폭 피해의 집단적 트라우마와 냉전 시대 핵전쟁에 대한 불안감이 현실적으로 감각되던 시기였던 만큼 이 작품이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을 것이다. 더욱이 당시에는 핵전쟁 이후의 근미래를 본격적으로 상상한 연극이 거의 없었던 시절이어서 형식적으로도 매우 독특한 작품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런 만큼 〈호기우타〉의 형식은 복합적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적 세계를 배경으로 한 부조리극적 경향이 강하면서도 연극성을 작품의 베이스로 유희적으로 전환하는 메타연극적 특징도 살려내고 있다.
1999년 이후 27년 만에 낭독공연을 거쳐 무대에 소환된 이유는 무엇일까? 요즘 세계는 여전히 핵전쟁의 위협과 전쟁의 공포 속에 놓여 있다. 주가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세계정치는 불안하며, 전쟁과 물가, 집값, 경제와 정치까지 삶을 낙관하기 어려운 시대다. 그래도 게사쿠와 교코처럼 견디며 웃고 노래하며 살아가야 하는 시대이기도 하기 때문일까? 특히 이번 공연은 각색 없이 야스오를 제외한 교코, 게사쿠 두 극 중 인물의 일본 간사이 지방 방언을 전라도 말로 처리한 것 외에는 4장으로 구성된(불꽃놀이, 반딧불이, 풍설, 석설) 각 장의 원작성에 충실해 보였다.
◇원작에는 충실했지만, 2026년의 동시대성은 아쉬워
〈호기우타〉무대는 핵전쟁 후 폐허가 된 몽환적이면서도 우화 같은 도시다. 앙상한 나무 몇 그루와 의자 두 개 정도만 놓여 있을 뿐이다. 원작에서는 두 사람이 손수레를 끌고 어디론가 향하는 것으로 처리하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나무 의자로 오브제화했고, 베리어프리로 자막을 띄웠다. 무대 중앙에는 자칭 '신'이라 부르는 극 중 인물 야스오의 지하세계와 지상을 연결하는 공간이 자리하는데, 나무 밑동을 형상화한 원형 구조는 삶과 죽음의 순환성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보인다. 바닥에는 방사능 낙진을 연상시키는 흰 가루가 모래더미의 원형 무늬를 이루며 쌓여 있는데 마치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세계이다. 무대 후면의 제방 언덕은 마치 그리스도가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길을 연상시킨다. 윤혜숙 연출은 원작의 포스트 아포칼립스적 분위기와 우화성을 비교적 충실하게 구현해 보였다.
특히 일본 지방 사투리를 전라도 사투리로 전환해 게사쿠와 교코의 언어를 전라도 정서로 그렸고, 핵전쟁 이후의 황폐한 세계를 현실과 환상, 희극과 비극이 공존하는 시적인 공간의 몽환적 이미지로 공간화했다. 1960년대 일본풍의 노래, 두 인물의 만담 같은 익살스러운 장면 설정, 무엇이든 원본만 있으면 대량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자칭 신 야스오를 현대적인 인물로 희화화한 캐릭터는 인간을 사랑하고 만물을 구원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장치처럼 보인다. 신은 절대적 구원의 존재가 아니라, 복제와 생산의 능력을 갖췄을 뿐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는 잔재주만 부릴 수 있는 마술사 같은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전환된다.
<호기우타〉는 핵전쟁 이후의 절망을 무겁게만 재현하지 않고, 희극적 장면과 부조리한 인물들을 통해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고, 또 어떻게 희망으로 다가설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듯 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교코와 게사쿠가 멸망한 고대 도시 모헨조다로를 향해 다시 길을 떠나는 것을 보면, 핵전쟁 이후의 문명은 구원받을 수 없는 폐허가 된 세계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두 인물은 노래를 멈추지 않고 다시 길을 떠난다. 결국 기타무라 소는 구원이 사라진 디스토피아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신이 아니라, 멸망의 도시로 떠나 그 도시를 다시 문명화할 수 있는 살아남은 인간이라는 점을 은유적으로 처리한 것 같다. 원작에 충실해 보이는 무대였기에 연출적으로 과한 장치나 전작 공연의 마지막 '석설' 장면에서 눈발인지, 방사능 오염물질인지도 모를 거대한 연출적 미장센도 없었고 과한 해석도 없었다. 이경민, 정다연, 우범진 배우들이 그려내는〈호기우타〉는 1979년 작품임에도 원작을 비교적 담백하게 형상화했다는 점이 장점이다.
그러나 원작에서 드러난 작가적 장치 외에 몇 가지가 핵전쟁 시대를 살아가는 2026년 오늘의 세계로 현실적으로 감각되기에는〈호기우타〉를 충분히 섭취한 느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아마도 연출은 희곡의 시점도 그렇고 핵전쟁 이후를 받아들이는 한·일의 정서가 다른 만큼 원작을 비교적 충실하게 살리는 방향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번역 자체도 일본 방언을 전라도 말로 옮겼고 이번 공연에서도 텍스트를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오히려 방언보다 표준어로 구사했다면 작품의 의미가 지역과 시대성을 초월해 더 확장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핵전쟁의 트라우마가 내재되어 있는 일본 관객들에게는 지역 방언이 작품의 정서를 환기하는 소외효과 장치로 비교적 자연스럽게 감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공연에서는 일본식 만담과 우화적인 종말적 세계, 우리 지역 방언이 하나의 정서로 충분히 융합되지 못한 듯한 인상이다. 방언을 차용한 번역 자체는 충분히 적절할 수 있지만, 오늘날 핵전쟁의 공포는 더 이상 특정 지역의 기억과 정서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에서 방언의 농도를 덜어내고 절제된 표준어로 순화했다면, 작품이 말하는 보편적인 종말의 공포와 인간의 생존 의식이 한국 관객에게도 더욱 자연스럽고 폭넓게 전달될 수 있지 않았을까.
두 번째는 4장으로 구성된 각 장별 전환(흐름)을 극 중 인물들의 대사와 교코, 게사쿠의 특징적인 행동과 죽음을 과도한 연출적 해석으로 형상화하지 않았는데, 이 점은 4장을 하나로 묶는 의미를 자연스럽게 연결한 장점이면서도 마지막 장면에서도 이미지적으로 연출적 의미를 크게 부여하지 않아 무대는 담백한 대신 연출의 시선은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았다. 초연 47년, 국내 공연 27년 만에 한국 연출에 의해 다시 무대에 오른 〈호기우타〉의 동시대적 의미가 다소 선명하게 감각되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윤혜숙 연출은 원작을 무리하게 현재화하거나 과도한 해석을 덧입히기보다 기타무라 소가 1979년에 희곡에 담아 놓은 핵전쟁 이후 인간과 문명, 그리고 희망에 대한 질문을 비교적 담백하고 충실하게 무대 위로 옮겨냈다는 점에서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공연이다.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