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 "비하 의도 가졌다기보다는 재미 위한 이유"
교사 정치적 중립성 이유로 마땅한 대응 방안 없어
"아, 스트레스받는데 부엉이 바위 가서 뛰고 싶다."
대구의 한 중학교 교사 김모(47) 씨는 쉬는 시간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서거한 지 20년 가까이 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희화화하는 말이 계속 들렸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묻자 "우리끼리 하는 놀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최근 고교 야구장에서 배재고 학생들이 광주제일고를 향해 이른바 '스타벅스 구호'를 외쳐 지역 비하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학교 현장에서는 '혐오 밈(meme·온라인 유행 콘텐츠)'이 일상 언어처럼 번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교육계에서는 이번 배재고 논란이 학생들 사이에 확산된 '혐오의 놀이화'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평가한다.
◆학교 현장에 퍼지는 혐오 문화
교육계에서는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 등 극우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소비돼 온 지역·성별·세대 갈등을 조장하는 혐오 문화가 학생들 사이로 빠르게 퍼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는 지난달 30일 배재고 사건과 관련한 입장문을 내고 "유튜브나 인터넷 커뮤니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무분별하게 소비되는 비하적 밈과 혐오 표현이 청소년들의 일상 언어문화를 지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5월에는 대구의 한 고교 축제에서 진행된 퀴즈쇼 내용이 온라인에 퍼지며 지역 비하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당시 퀴즈 문제는 '가장 쓸모없는 섬은?'이었고, 보기에는 '독도', '제주도', '전라도' 등이 제시됐다. 지난해 경기 부천의 한 고교 축제에서도 동덕여대의 공학 전환 반대 시위를 희화화한 퀴즈쇼가 진행돼 여성 혐오 논란이 일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지난 2~6일 현직 초·중·고교 교사 1천10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학생들의 극우화된 혐오 표현 가운데 '부엉', '노무노무(너무너무)', '문재앙', '최고 빨갱이 김대중' 등 정치인이나 역사적 인물의 죽음과 비극을 조롱하는 표현을 접했다는 응답이 88.9%로 가장 많았다. 이어 여성·성소수자·장애인·이주민 혐오와 차별(86.8%), 세대·직업·계층 비하(81.8%), 역사적 사건 왜곡·희화화(80.5%) 순이었다.
◆일상화된 '혐오의 놀이화'
실제 지역 학생과 교사들도 학교 현장에서 '혐오의 놀이화'가 일상이 됐다고 입을 모았다. 다만 특정 대상을 비하하거나 정치적 의도를 갖고 사용하기보다는 또래끼리 재미를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지난 2일 대구 수성구 범어동 학원가에서 만난 초·중·고교생 10명 가운데 7명은 학교에서 혐오 표현을 자주 듣는다고 답했다.
고1 전모 군은 "주변에서 '노무노무', '~하노', '운지'(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비하하는 표현), '야 기분 좋다'(노 전 대통령의 귀향 연설 중 한 발언을 희화화한 표현) 등을 많이 쓴다"며 "노 전 대통령을 특별히 싫어해서가 아니라 어감이 재미있어서 유행어처럼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2 박모 군은 "홍어(호남 지역 비하 표현), '전라도는 다른 나라' 같은 지역 비하 표현도 가끔 쓴다"며 "큰 의도 없이 쓰는 아이들도 있고, 대구가 보수 성향이다 보니 맹목적으로 전라도를 싫어하는 정서가 배어 사용하는 아이들도 있다"고 했다.
이 같은 혐오 표현은 중·고등학교에서 주로 사용되지만 일부 초등학교 고학년까지 확산되는 모습이다.
초등학교 6학년 조모 양은 "'틀딱'(틀니 딱딱의 줄임말로 노인을 비하하는 표현), '노알라'(노 전 대통령과 코알라를 합성한 이미지), '북딱북딱'(노 전 대통령 발언을 희화화한 표현) 등을 들어봤다"며 "처음에는 '왜 저런 말을 쓰지'라고 생각했는데 다들 쓰다 보니 무뎌져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고 말했다.
◆교사들 "대응 방안 없어"
교사들은 최근 몇 년 사이 학생들의 혐오 문화가 심해졌지만 마땅한 대응책이 없다고 토로한다.
12년 차 초등교사 신모(36) 씨는 "교과서에 부엉이 이야기만 나와도 아이들끼리 킥킥거리며 일베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많이 쓴다"며 "일부 교사는 해당 용어 자체를 모르고, 의미를 아는 교사들도 괜히 지도했다가 정치적으로 편향됐다는 항의를 받을 수 있어 '잘 모르는 말을 함부로 쓰는 것은 좋지 않다'는 정도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역의 한 중학교 교사 김모(45) 씨도 "국어 시간에 소설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성차별적 요소를 설명하는데 일부 학생들이 대뜸 '페미니즘 싫어요'라고 말하더라"며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혐오 발언을 하는 학생들이 반마다 몇 명씩은 꼭 있다"고 말했다.
이어 "단편적으로 지도는 하지만 이런 상황을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 교육부나 교육청 차원의 자료가 전혀 없다"며 "동료 교사들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라고 토로했다.
여승현 대구교육대 교수는 "초등학생만 돼도 스마트폰을 사용하다 보니 유튜브와 SNS, 게임 등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표현에 학생들이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며 "유해한 환경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안전망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어 "호주 등 주요 국가들이 청소년의 SNS 이용을 제한하고 있는 만큼 관련 사례를 살펴보고 참고할 필요가 있다"며 "아이들의 기본 소양을 충분히 길러 스스로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단계가 된 이후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국가적 차원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