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의 연극리뷰] 이양구 작, 안경모 연출의 <잔류시민> '잔류(殘留)된 사법정의와 언어'

입력 2026-06-20 0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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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서울연극협회, (주)연우무대
서울연극협회, (주)연우무대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사법부와 검찰에 대한 불신은 몇 차례 대선을 거치며 대한민국을 강타한 굵직한 사건들을 통해 누적돼 왔다. 검찰의 기소권 남용 논란과 재판거래 의혹 등이 잇따르면서 시민들은 검찰과 사법부가 정치화되는 과정에 염증을 느껴왔고, 누적된 피로는 고름 한 번 제대로 짜내지 못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여야의 난타전으로 되풀이됐다. 공정과 상식, 정의의 최후 보루여야 할 사법부의 가치마저 위태롭게 흔들리는 장면들을 지켜보며 시민들은 한숨만 내쉬어야 했다. 검찰개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재판소원제 도입을 통한 사실상의 4심제, 검찰청 폐지와 공소청 전환, 마지막으로 남은 검찰의 보완수사권 폐지와 공소권 조정 등을 둘러싼 논쟁까지 더해지면서 한국 사회의 사법 체계는 전환기에 놓여 있다. 이런 점에서 제47회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 이양구 작, 안경모 연출의 <잔류시민>(대학로극장 쿼드, 연우무대)은 동시대 논쟁의 한복판에 놓인 사법개혁과 검찰개혁, 사법부의 공정성과 정치적 중립성 문제를 떠올리게 하며 "사법 정의란 무엇이며 검찰과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다가서는 작품이다.

서울연극협회, (주)연우무대
서울연극협회, (주)연우무대

◇ 현재로 소환된 한국전쟁의 <잔류시민>

한국전쟁 발발 이후 서울이 함락되고 한강철교가 폭파된 뒤 피난을 떠나지 못한 채 서울에 남겨진 잔류시민들의 역사성을 바탕으로 한 <잔류시민>은 서울 수복 직후 잔류시민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부역 혐의자 재판을 모티프로 삼는다. 당시 제정된 「부역행위특별처리법」을 근거로 한 재판 과정에서는 피고인의 충분한 방어권이 보장되지 못한 채 검찰의 공소사실과 조서에 의존해 사형과 무기징역 등 중형이 선고된 사례들이 이어졌다. <잔류시민>은 서울 정동의 서울중앙지방법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가족들을 남겨둔 채 서울 수복(收復) 후 돌아와 부역자 재판을 맡게 되는 판사 김병호(이종무분), 부역자로 몰리고 있는 아내 오수인(황은후 분), 정부의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검사로 부역자 피고인들의 기소에 주력하는 검사(백성철 분), 서울 함락 이후 법원 자치위원장을 지내며 북에 협력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게 되는 전 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 홍승호(정원조 분), 김병호 판사와 함께 부역자 재판의 부당성을 고뇌하는 강 판사(우범진 분), 재판의 기록자인 지방법원 서기 김수진, 그리고 부역자 재판에 연루된 김병호 판사의 아들 김정욱(황규찬 분)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무대는 법원의 공간적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법정을 중심으로 망자가 된 잔류시민들의 흔적과 관사, 법원 주변 공간으로 현장검증 정도의 장면이 이어지지만, 안경모 연출은 장면과 공간을 분절하거나 전환하지 않는다. 대신, 끊어진 한강철교의 잔해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구조물을 천장 위로 들어 올려 시각화했다. 무대 바닥 면에는 재판기록을 연상시키는 수백 장의 종이가 부역자 재판의 혼령처럼 엉켜져 덮여 있다. 육중한 철골 구조물과 바닥을 뒤덮은 종이 더미는 전쟁의 폐허와 기록되지 못한 죽음, 국가 권력이 남긴 판결의 흔적을 압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재판으로 희생된 망자들이 무대를 유람하는 프롤로그부터 서기(김수진 분)의 "1950년 10월… 개전 직후 서울을 떠났다가 정부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를 만들고 인민군 치하에 있었던 서울 시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부역범 색출과 검거에 나섰다…"라는 독백으로 시작된다. 느리게 부유하는 망자들의 몸짓과 한국전쟁의 폭격음, 굉음은 특정한 시공간의 경계를 지우며 역사의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운 현재의 공간으로 전환한다. 작가는 역사적 사실성 위에 허구를 덧입혀 사법 정의가 무너진 현실을 포개고, 무고한 시민들 사이에서 정의를 두고 고뇌하는 인물을 그려낸다. 그 중심에 김병호 판사가 있다.

서울연극협회, (주)연우무대
서울연극협회, (주)연우무대

서울 함락 후 가족을 두고 피난길에 오른 김병호 판사는 수복 후 되돌아와 경미한 부역자 재판을 맡게 된다. 김 판사는 피고인들의 행위를 무죄로 보면서도 검사의 공소 강압과 한국전쟁이라는 비상사태로 인한 이념 대립의 극단화 사이에서, 헌법이 지향하는 정의와 인간의 존엄, 그리고 잔류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실정법(특별법) 사이를 두고 끊임없이 고뇌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작가는 여기에 한발 더 나아가 김 판사를 중심으로 가족의 부역 혐의를 연결해 드라마 구조를 만든다. 피란을 간 뒤 서울에 잔류한 가족 중 막내는 죽은 것으로 처리되고, 아내는 당시 김 판사의 선배인 홍승호 전 판사가 서울 함락 후 북한 점령기 서울중앙지방법원 법원 자치위원장으로 발령받은 뒤에도 기존 관사에 그대로 머문다. 아내 오수인은 관사에 머물던 홍 판사의 살림을 거들고 끼니를 챙겨준 일마저 부역 행위로 의심받는다. 큰아들 정욱 역시 북한 점령기 내무서에서 근무했다는 이유로 부역 혐의의 대상이 된다. 생존을 위한 일상의 노동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선택, 체제와 무관한 시민의 행위까지도 수복 이후 '부역'이라는 이름으로 재단될 수 있었음을 드러내는 설정들이다.

특별법을 어긴 <잔류시민>들을 대상으로 판결을 서두르라는 검사와 특별수사본부의 압박, 김 판사의 고뇌가 극 초반에 그려진다. 중반을 넘어서면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소속 검사는 마지막 카드로 부역 혐의를 받은 김 판사의 아내 오수인을 구속해 재판에 넘긴다. 당시 부역 행위의 증인으로 출석한 홍승호는 결정적으로 관사에 머물던 가족에게 퇴거 명령을 하지 않았다는 유리한 증언을 쏟아내 강 판사에 의해 오수인은 풀려나게 된다. 김 판사는 망자가 되어 떠나는 홍승호에게 노잣돈을 쥐여준다. 극 후반부에는 인민군 치하 여성 동맹위원회에서 활동했던 맹정숙과 그를 밀고한 여정자의 현장검증 장면이 이어진다. 이를 통해 김 판사는 부역 행위가 단순한 법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한쪽의 시선과 왜곡된 증언, 개인적 원한과 복수가 뒤얽혀 재구성될 수 있음을 목격한다.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던 한국전쟁의 상황 속에서 특별법은 여론을 결집하고 사회적 분노를 수습하기 위한 정치적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되고, 그는 특별법의 적용보다 헌법이 규정한 법의 정의와 인간의 존엄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한다는 신념 앞에서 고뇌를 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김 판사는 부역자 재판의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여전히 서울중앙지방법원을 배회하는 것은 부역자 재판으로 법원을 떠도는 망자들의 혼령(魂靈)이다.

서울연극협회, (주)연우무대
서울연극협회, (주)연우무대

◇ 이양구 작가의 잔류된 정의와 언어

이양구 작가의 문제의식과 작의적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한국전쟁기의 부역자 재판을 통해 동시대 사법 정의와 법의 역할을 환기하려는 희곡 역시 의미가 크다. 다만 이 작품은 오히려 희곡보다는 소설의 형식으로 읽혔더라면 더 풍부한 설득력을 얻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구성의 개연성과 한국전쟁 당시 부역자 재판의 특수성을 현시점의 사법 논쟁과 연결하기 위해 배치된 몇몇 장치들이 다소 느슨하게 엮이면서 인물들의 관계와 부역자 재판의 개연성이 현실적으로 떨어진다는 느낌을 준다.

첫 번째는 김병호 판사와 가족을 부역 혐의의 대상자로 묶은 점이다. 전쟁통에 막내 아이의 죽음, 김병호 판사의 나 홀로 피난 후 수복 뒤 되돌아온 설정은 한국전쟁 당시의 현실과 비극성을 환기하는 장치로 보이지만 설득력은 떨어져 보였다. 더욱이 남편과 함께 한강 이남으로 피난을 떠나지 못한 채 관사에 머물던 오수인이 선배 판사 홍승호의 살림을 거들고 끼니를 챙겨준 것이 부역의 증거로 전환되는 과정, 큰아들의 내무서원 근무 당시의 행위들을 가족관계로 묶은 뒤 김병호 판사를 사법 정의를 고뇌하는 인물로 형상화해 마지막에는 무죄를 선고하는 판결을 통해 사법 정의의 회복이라는 작품의 주제성을 부각하지만, 충분히 살아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오히려 가족의 부역 혐의와 개인적 비극에서 벗어나 한국전쟁이라는 당시 상황 속에서 <잔류시민>을 대상으로 이념화된 법과 정의만으로 국가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재단했는지 현실감 있게 집중했다면, 사법부와 검찰 불신의 시대에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깊어졌을 것이다. 두 번째는 검사의 인물 형상화 방식이다. 작품 속 검사는 오늘날 흔히 말하는 '정치검사'의 이미지에 가깝게 그려진다. 재판 과정에서 헌법적 정의와 특별법 사이에서 고뇌하는 김병호 판사와 정부의 입장, 즉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의 논리를 대변하는 검사의 대화, 그리고 오수인을 기소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검사의 태도는 부역자 재판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 인물이라기보다 동시대 정치 현실의 인물처럼 느껴진다. 작가가 부역자 재판이라는 역사성을 통해 사법 정의가 실종된 현실의 의미를 이미지화하려는 의도는 읽히지만, 그 간극 역시 선명하지 않다. 좁혀 말하면, 부역자 재판을 통해 벌어지는 법과 정의의 대립, 생존과 이념 사이의 문제, 국가가 한국전쟁이라는 특수성으로 개인의 삶을 무력화하는 역사적 성찰보다 오늘의 정치 현실과 연결하기 위한 설정만 주목받는 인상이다.

점령 당시 부역한 죄로 사형이 선고되는 홍승호의 캐릭터를 오수인을 구출하기 위한 장치로만 연결한 점도 그렇다. 그런 점에서 김 판사의 무죄 선고는 현실적 판단이라기보다 정의를 구현하는 시대의 영웅적 판사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한 설정처럼 느껴진다. 헌법적 가치와 양심에 충실한 법관의 모습을 통해 사법 정의의 회복 가능성을 <잔류시민>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는 이해되면서도, 판결에 이르는 과정의 개연성이 비현실적인 결말로 느껴진다. 마치 인위적으로 김 판사를 영웅적으로 이미지화하는 것처럼. 또한, 무대의 육중한 무게감에 비해 공간은 지나치게 단일화돼 있다. 법원이라는 폐쇄적 공간을 중심으로 시간의 시점을 지우고 과거와 현재를 중첩시키려는 연출 의도로 읽히지만, 끊어진 한강철교의 잔해를 연상시키는 구조물과 재판기록을 뒤덮은 무대가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이미지에 비해 공간 활용의 확장성과 서사의 전개는 제한적으로 보였다. 공연을 본 뒤 <잔류시민> 희곡을 두 번 읽고 무대를 복기하며 내린 결론은, 이양구 작가의 변화 가능성은 충분히 느껴졌음에도 그 이전에 발표한 <일곱집매>, <복도에서>, <노란봉투>, <이게 마지막이야>, <집집: 하우스 소나타> 같은 작품들에 더 애착이 간다. 그 작품들에는 분명한 '이양구스러움'이 있다.

서울연극협회, (주)연우무대
서울연극협회, (주)연우무대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