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윤정현]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제도가 아니라 깨어 있는 양심이다

입력 2026-06-25 08:5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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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현 영남대 경영학과 교수

윤정현 영남대 경영학과 교수
윤정현 영남대 경영학과 교수

최근 지방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우리 사회에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시작이자 완성이다. 국민이 국가 운영에 참여하는 가장 기본적인 절차이며, 헌법이 보장하는 참정권이 실현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어떠한 문제도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전국 50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했으며, 이 가운데 22개 투표소에서는 투표가 일시 중단되었다고 밝혔다. 이에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은 대국민 사과와 함께 사의를 표명하며 "선거 관리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훼손하여 선거 과정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무한한 책임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우리는 이 사안을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세력의 문제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왜 이러한 일이 발생했으며, 왜 국민들이 쉽게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이다. 민주주의는 결과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과정에 대한 신뢰가 뒷받침될 때 비로소 국민은 결과를 수용한다. 절차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게 된다. 의혹이 사실인지 여부는 철저한 조사와 검증을 통해 밝혀져야 할 문제다. 그러나 국민이 의문을 품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심각한 사회적 경고 신호라 할 수 있다.

사실 선거관리기관을 둘러싼 우려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채용 비리 논란, 조직 운영의 문제, 반복된 관리 부실 논란은 오랜 기간 국민적 불신을 누적시켜 왔다. 그렇기에 이번 사태는 단순한 행정 실수 이상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우려하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의 침묵이다. 과거 민주주의와 인권, 공정과 정의를 위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었던 시민사회와 법조계, 학계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수많은 인권단체와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사회적 불공정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지식인들은 오늘의 상황에 대해 과연 충분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는가?

필자는 특정한 입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선거 결과를 부정하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민주주의의 핵심 절차에 대한 국민적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만큼은 누구보다 먼저 내야 하는 것이 시민사회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선택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자신이 동의하는 사안에 대해서만 정의를 말하고, 자신이 불편한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면 그것은 원칙이 아니라 입장에 불과하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정권이 바뀌어도, 정치적 유불리가 달라져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데서 출발한다. 특히 대학 사회 역시 예외일 수 없다. 과거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험할 때마다 대학은 가장 먼저 질문했고, 가장 먼저 토론했으며, 가장 먼저 행동했다. 그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져야 한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때로는 위험한 방관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어느 한 진영의 승리나 패배를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 민주주의라는 공동의 자산이 얼마나 건강하게 유지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할 때다. 국민이 선거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하고, 선거관리기관이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하며, 어떠한 의혹도 객관적 절차를 통해 검증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그 말이 거창한 정치적 구호일 필요는 없다.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상식적인 외침이면 충분하다. 국민의 참정권은 그 어떤 이유로도 가볍게 다루어질 수 없으며, 선거에 대한 신뢰는 어느 시대 어느 정부에서도 흔들려서는 안 된다.

오늘 이 글이 정답을 제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 사회가 잊지 말아야 할 질문을 던지고자 함이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은 언제나 노골적인 억압만이 아니었다. 때로는 익숙한 침묵과 무관심이 민주주의를 더 깊이 병들게 했다. 부디 우리 사회의 양심과 지성이 다시 한번 깨어나기를 바란다. 한 사람의 작은 목소리가 또 다른 목소리를 부르고, 그 목소리들이 모여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출발점이 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