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아트피아 '결의 온도: 깎은 기억, 부푼 시간'
이상헌 목조각가, 김태인 금속조각가 참여
일부 작품 만질 수 있는 '촉각 전시'…6월 5일까지
누군가는 깎아내고, 누군가는 공기를 채워넣어 조각품을 탄생시킨다.
수성아트피아가 올해 첫 기획전으로 선보인 '결의 온도: 깎은 기억, 부푼 시간'은 이상헌, 김태인 조각가의 작품 세계를 통해 조각의 본질인 '물성'과 '촉각'을 재조명한다. 특히 이번 전시는 기존의 눈으로만 보는 관람에서 벗어나, 일부 작품들을 관람객이 직접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촉각 전시'로 기획돼 눈길을 끈다.
◆예술로 치유한 유년시절의 상처
전시장에 한 켠에 놓인 높이 2m의 대형 의자를 손으로 가만히 쓸어보고, 앉아본다. 이상헌 작가의 나무 작품은 표면이 매끈하지 않고 조각칼이 지나간 흔적들을 그대로 드러낸 모습이다. 패여진 자국에서는 나무의 향이 배어나와 관람객의 감각을 붙잡는다.
"거친 환경에서 자란 나무 본연의 물성을 좀 더 살리고 싶었어요. 어린 시절의 외롭고 힘들었던 기억을 가진 저를 표현함에 있어서도 잘 맞았고요."
그의 말처럼, 작품은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에서 출발한다. 초등학교 1학년,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친구들은 우산을 들고 온 부모와 함께 하나 둘 떠나갔다. 겨우 8살, 맞벌이하는 부모님이 못 오시는 걸 알면서도 그걸 들키기 싫어서 기다리는 척 했고, 마침내 혼자 남겨졌다.
"옆에 의자가 하나 넘어져있었어요. 마치 내 모습 같았죠. 그걸 보자마자 부끄럽고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터졌어요. 근데 그 장면이 꽤 오랜 시간, 트라우마처럼 남았습니다. 대학교 때 나도 모르게 나를 투영한 의자를 만들곤 했어요."
초기에 뒤틀리고 불안정했던 모습의 의자는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 있는 단단한 모습으로 점차 변했다. 의자를 만들며 기억을, 상처를 꺼내보일수록 그 빈 곳에는 자유로움과 안정감이 채워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상처를 외면하고 숨기는 데 반해, 그는 그것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은 물론 타인의 아픔까지 치유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예술가의 역할은 한 사람이 자신의 상처를 예술 작품으로 드러냈을 때,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작품을 보며 공감과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시장에는 근작 '몽상가의 불안한 내면 풍경' 시리즈도 전시됐다. 미완성의 공간에 놓인 의자와 어린 왕자가 눈에 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셋방살이에, 쫓기듯 이사를 다녔어요. 그러니 집은 제게 항상 불안한 공간이었어요. 저를 닮은, 불완전한 의자들도 사방에 널려있죠. 하지만 자아를 찾아가던 어린 왕자도 공존하는, 유년시절의 나의 모습들을 담은 작품입니다."
조소를 전공한 그가 처음부터 나무를 다뤘던 건 아니다. 2002년 뇌종양 수술이 변화의 계기가 됐다. 그 전까지 철, FRP(섬유강화 플라스틱)와 화학 약품을 다뤘는데, 그게 병의 원인이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는 "나무는 특히 살아있었던 생명이기에 더욱 다루기 힘들었다"며 "그 반발을 이겨내려 하기보다는, 받아들이고 육체적 노동에 가까운 작업에 몰두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다보면 나도 모르게 나무와 뭔가가 일치하는, 경계가 사라지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그 삼매(三昧) 속에서 온전한 작품 하나가 탄생하는 경험을 간혹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재료를 존중하는 마음이 곧 세상을 대하는 태도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공격적이고 파격적이었던 작업은 점차 은유와 사유를 담은 작품으로 바뀌었고, 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됐다는 것.
"거칠고 단단한 결을 따라 손을 움직이며 마음 속 상처와 불안이 서서히 치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완성한 제 작품이 관람객 각자의 내면에 자리한 불안을 어루만지고, 나아가 우리 삶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해 사유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공기와 함께 담은 기억과 감정
공기를 넣어 부풀린 은색 셀로판지라고 생각하며 작품 가까이 다가간 관람객들이 이내 놀란다. 누르면 폭 들어갈 것 같은 따뜻한 느낌이 예상되지만 스테인리스판이라는 차갑고 딱딱한 물성. 그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은 작품을 다시 한 번 낯설게 바라보도록 만든다.
김태인 작가는 면의 가장자리를 붙인 스테인리스 판에 공기를 넣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외부에서 열을 가하는 것. 그 부분만 둥글게 부풀어오르며 공기가 빵빵하게 찬 듯한 표현이 완성된다.
"유리나 플라스틱은 외부에 강한 충격이 가면 깨져버리는데, 가장 강할 것 같은 금속은 연성(延性)이 있어서 오히려 깨지지 않고 팽창하거나 꺾여요. 그 성질을 이용해서 열과 공기로 늘려가며 형태를 만드는거죠."
작품에는 공기뿐 아니라 작업하는 순간의 감정과 기억, 시간이 공기와 함께 담긴다. 과거를 품은 그의 작품은 현재와 계속 맞닿으며 새로운 미래를 받아들이는 매개체가 된다.
"작품마다 그걸 만들 때의 제 기분이 어땠는지 떠올릴 수 있어요. 저만의 말풍선이자, 기억의 저장소랄까요. 예를 들어 전시장 모서리에 전시한 작품의 주제는 '접어둔 기억'인데, 제게 좋지 않은 기억들, 좀 잊고 싶은 기억들을 넣어뒀어요."
이 작업을 시작한 건 2012년부터다. 이전에는 철판을 두드려서 조각을 만드는, 필연성이 강한 작업을 해왔다.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 매일 큰 작업만 하다보니 섬세한 작업을 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싶어서 금속 주얼리 수업을 신청했어요. 그때 링을 만들면서 판과 판 사이에 열을 가하며 공기를 넣는 작업을 했고, 금속이 가진 연성의 성질을 알게됐어요. 한국 가면 꼭 시도해봐야겠다고 다짐했죠. 그 수업이 저에게는 작업의 변곡점이 된 셈입니다."
전시된 모든 작품의 타이틀은 '우연한 팽창'이다. 철저하게 작업 계획을 잡지만 작업 과정에서 일어나는 작은 우연들이 결과물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열을 천천히 가하는 동시에 밀어내는 공기가 만들어내는 주름은 때로는 예상치 못한 형태를 만들어낸다.
그는 "내 의도를 벗어나 재료가 주도권을 가지는 순간이 오는데, 그때부터는 거기에 맡기고 따라가야 한다. 욕심을 내서 열을 조금만 더 가하면 폭발하기 때문이다. 금속과 계속 호흡을 하다보니, 이제는 그 우연한 형태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게 된 것 같다"며 웃어보였다.
"관람객들이 제 작품을 보고 금속을 재료로 이렇게까지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며 물성에 대한 무한함을 느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또한 반짝이는 스테인리스에 비친 관람객들의 모습이 제 과거의 기억과 마주하고, 미래를 향한 소통이 동시에 이뤄지는 소중한 전시가 되길 기대합니다."
전시는 6월 5일까지 이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