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0년, 격동 80년]나라 뒤흔든 정경 유착 사건 '사카린 밀수'

입력 2026-05-22 1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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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린을 건설자재로 위장, 부산세관에 적발
이병철 회장, 박정희 대통령에 "뒷돈 100만 달러"
부도덕한 삼성, 사카린에 더해 다른 품목도 밀수

1966년 10월 5일자 매일신문 1면에 보도된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 출처=매일신문 DB
1966년 10월 5일자 매일신문 1면에 보도된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 출처=매일신문 DB

"돈 되는 사카린, 밀수로 어마어마한 폭리"

1966년 전국을 뒤흔든 사카린 밀수 사건은 "욕심은 화를 부른다"는 큰 교훈을 남겼다. 삼성 이병철 회장이 국가 차원의 큰 특혜를 누리면서, 그것도 모자라 부정한 방법으로 폭리를 취하려다 덜미가 잡힌 것이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국정 구호를 '부패척결'로 내세웠지만, 정경 유착 비리임도 드러났다.

이맹희 회장(이건희 兄)은 1993년에 발간된 '회상록, 묻어둔 이야기'를 통해 사카린 밀수 사건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 기관들이 눈 감아준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인 밀수라고 고백했다. 밀수현장은 본인이 직접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왔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산업화 과정 속에 어두운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 일대 사건이었다.

박정희(사진 왼쪽)대통령과 호암 이병철 회장.
박정희(사진 왼쪽)대통령과 호암 이병철 회장.

◆정경 유착, 사카린을 건설자재로 위장

한국전쟁(6·25) 이후 제당업은 국가 차원의 산업재건 계획 안에 포함됐다. 대구에 본사를 둔 삼성물산 이병철 회장은 1953년에 제일제당을 설립했으며, 자본금 18만5천 달러를 정부에서 지원 받았다. 게다가 원료 수입 독점권과 함께 환율 혜택 등 엄청난 특혜를 누렸다. 이런 특혜에도 불구하고, 삼성물산은 더 큰 수익을 노리고 밀수를 계획했다.

1966년 5월24일, 삼성은 울산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가 사카린 2천259 포대(약 55t 물량)를 건설자재로 속여 세관을 통해 들여오려다 덜미가 잡혔다. 뒤늦게 이를 적발한 부산세관은 같은해 6월 1천59 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천만원을 부과했다. 또, 당시 삼성은 일본 미쓰이 물산으로부터 정부의 지급보증 하에 4천200만 달러의 상업차관도 빌린 상태였다.

일본 미쓰이는 공장건설에 필요한 상업차관(4천200만 달러)을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리베이트(뒷돈)로 100만 달러를 건네줬다. 이병철 회장은 이 사실을 박 전 대통령에게 알렸다. 이에 박 전 대통령은 "여러 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서로 간의 이해가 딱 맞아 떨어졌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가 들여와야 했고, 청와대는 정치자금(검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소속 김두한 의원이 9월 22일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한 대정부 질의 도중 국무위원석에 앉아 있던 정일권 국무총리, 장기영 부총리 등 여러 각료들에게 오물 투척을 보도한 매일신문 화보.
무소속 김두한 의원이 9월 22일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한 대정부 질의 도중 국무위원석에 앉아 있던 정일권 국무총리, 장기영 부총리 등 여러 각료들에게 오물 투척을 보도한 매일신문 화보.

◆국가적 파문, 한국비료 국가에 헌납

21세기 글로벌 일류 기업이 된 삼성그룹 차원에서는 이 사카린 밀수 사건은 아픈 흑역사다. 당시 군사정권과 결탁해 부정한 방법으로 폭리를 취하려 한 범죄였으며, 대한민국 산업화 과정에서 나라를 대표하는 대기업이 어떻게 급성장 했는지를 보여주는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정경유착 사건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 외에도 삼성은 또 한번 국가를 속였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맹희 회장은 정부가 눈감아 주기로 하자, 한술 더 떴다. 밀수를 하는 김에 사카린 원료를 비롯해 수입이 어려운 공작기계나 건설용 기계,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스테인리스 판 등도 들여오려 했다.

이병철 회장이 박 전 대통령과 내통해 국가간 밀수가 허용되자, 삼성은 정부 모르게 몇가지 욕심을 더 냈다. 이 사건이 터지자 박정희 정권과 삼성 모두 국민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처지가 되었으며, 국민적 지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쩌랴? 나라의 산업화라는 큰 명분 아래 법적 처벌(큰 액수의 벌금형)마저 적었다.

삼성은 이 사건으로 전국 방송 및 신문사로부터 뭇매를 맞아야 했다. 기업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은 삼성은 대국민 사과와 함께 그룹 차원의 대대적인 조치를 내렸다. 이병철 회장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삼성의 계열사인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했으며, 매스컴(중앙일보 등)과 학원 사업을 철수하기로 했다.

한편,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유명했던 무소속 김두한 의원은 그 해 9월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한 대정부 질의 도중 국무위원석에 앉아 있던 정일권 국무총리, 장기영 부총리 등 여러 각료들에게 오물을 투척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