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욱의 대구문화 오디세이] 대구 속 '왕건'의 전설

입력 2026-05-03 10: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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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국립공원공단 제공
팔공산. 국립공원공단 제공

약 1천년 전, 팔공산을 중심으로 치열한 전쟁과 생사의 갈림길이 숨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후백제 견훤(甄萱) 간에 벌어진 공산전투(公山戰鬪)다. 공산전투는 서기 927년에 대구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큰 전투이다.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싸움은 주로 팔공산 지역에서 이뤄졌으며, 그 흔적은 대구 곳곳의 지명과 전설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이러한 지명들은 주로 후백제와 고려 간의 접전지와 왕건이 탈출하며 들린 장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충렬도. 동구청 제공
충렬도. 동구청 제공

통일신라의 중악(中岳)이자 민족의 명산인 팔공산 지명에 대한 유래로는 몇 가지가 전해진다. 그중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유래는 공산전투에서 신숭겸을 비롯한 김락과 김철, 전이갑과 전의갑, 전락, 호원보, 손행 등 여덟 명의 장군들이 왕건을 지켰다고 해서 원래 '공산'이었던 이름에 여덟 팔(八)자를 붙여 '팔공산(八公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팔공산은 충성과 희생이 깃든 역사를 간직한 산이다.

그리고 금호강과 동화천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근처에는 '살내'라 불리우는 순우리말 지명이 있다. 살내는 '화살(箭)로 가득찬 하천(灘)'이라는 의미로, 한자로는 '전탄(箭灘)'이라고도 불린다. 이라한 지명을 통해서 왕건과 견훤이 하천을 사이에 두고 양 진영에서 수천의 군사들이 쏜 화살이 너무 많아 하천을 가득 메울 만큼 그 당시 전투상황이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연경동 천년 느티나무. 북구청 제공
연경동 천년 느티나무. 북구청 제공

한편, 북구의 동변동과 서변동 지역을 일컬어 '무태(無怠)'라 불리는 지역이 있다. 무태의 지명유래에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에는 왕건이 군사들에게 '태만하지 말고 각별히 경계하라'는 의미에서 무태라는 지명이 생겨났다는 설이 가장 널리 퍼져 있다. 실제로 서변동에 있는 서계서원 「환성정기(喚惺亭記)」에는 이러한 유래를 알 수 있는 '동즉여조지토견훤시경군왈무태자야(洞卽麗祖之討甄萱時警軍曰無怠者也)'라는 문구가 있다. 또 다른 유래는 왕건 군대가 이곳 지역민들이 부지런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태만한 자가 없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무태 지역에서 팔공산 쪽으로 가다 보면 '연경(硏經)동'이 있다. 이 연경이라는 명칭 또한 왕건이 이곳을 통과해 갈 때, '마을에서 책 읽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연경동에는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천년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왕건과 견훤의 공산전투를 지켜본 유일한 나무로 추정되고 있다.

신숭겸 장군상. 대구시 제공
신숭겸 장군상. 대구시 제공

연경동과 지묘동 사이에 '나팔고개'가 있다. 이 나팔고개라는 지명은 공산전투에서 크게 패한 왕건의 군대가 퇴각하는 도중 백제군의 진군나팔 소리를 듣고 왕건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고 해서 생겼다고 한다. 이 나팔고개를 지나면 동구 '지묘동'이 나온다. 지묘동의 지묘(智妙)는 '지혜로운 묘책'이라는 뜻인데 신숭겸이 후백제군의 눈에 잘 띄는 왕건의 전투복을 입고 왕건인 척 싸우고 후백제군을 자신에게로 유인함으로써 왕건을 위기에서 구한 지혜에서 비롯되었다. 신숭겸은 자신이 죽음으로써 왕건을 구한 것이다. 왕건은 신숭겸이 전사했던 장소에 그 충성을 기리기 위해 지묘사(智妙寺)를 세웠다. 그래서 지묘동이라는 지명은 지묘사가 있던 동네라는 데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군대가 격파되었다'는 뜻에서 붙여진 고개인 '파군재(破軍岾)'가 있다. 고려군이 후백제군에게 크게 패한 데에서 나온 명칭이 '파군'이고, 지형적으로 고개라는 특성에서 파군재가 된 것이다. 또 신숭겸 장군 유적지 뒤편에 세모난 모습으로 봉우리가 우뚝한 산이 있는데, 이 산이 바로 왕건의 탈출과 연관이 있는 '왕산(王山)'이다. 왕건이 파군재 전투에서 패한 후 잠시 물러가서 몸을 수습하고 살아난 곳이라는 뜻에서 왕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숭겸 장군 유적지와 왕산 전경. 동구청 제공
신숭겸 장군 유적지와 왕산 전경. 동구청 제공

계속해서 피신하던 왕건은 동화사 뒤에 있는 염불암 쪽으로 향하다가 염불암 인근에 있는 집채만큼 큰 바위 위에 앉게 되었다. 도주하던 왕건이 퇴로를 궁리하면서 이 바위 위에 홀로 앉았다고 하여 '일인석(一人石)'이라 불려진다. 파군재를 넘어 봉무동으로 탈출 중이던 왕건이 홀로(獨) 앉아(坐) 쉬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바위(巖)인 '독좌암(獨坐巖)'도 있다.

왕건이 참패를 당하고, 탈출하면서 불로동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당시 마을에 나이 든 어른은 없고, 어린아이만 있다고 해서 그 마을 이름을 '불로동(不老洞)'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평광동에 '시량이'라는 마을이 있다. 시량이는 공산전투에서 패한 왕건이 달아나던 중 이곳에서 주먹밥을 얻어먹고 홀연히 사라져 '왕(王)이 사라진(失) 곳'이라는 뜻에서 실왕리(失王里)가 되었다. 이후 실왕리로 불리던 것이 차츰 음이 변하여 시량이라 불렸다고 전해진다. 왕건은 사지를 탈출하여 안심 지역에 와서야 후백제군의 추격을 따돌렸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때 '이제야 살았다!'는 안도의 마음에서 '안심(安心)'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안심 지역은 속칭 '반야월(半夜月)'이라 불린다. 그 이름의 유래는 고려 왕건이 쫓기던 중 이 지역을 지나갈 때, 때는 반야(半夜) 즉 한밤중에, 중천에 달(月)이 떠 있어서 그 도주로를 비춰주었다고 한데서 연유한다.

독좌암.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독좌암.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왕건과 관련된 지명은 대구 남구 앞산 지역에도 많이 존재한다. 그 중 '안지랑이'는 '왕지렁이'라는 별명을 가진 견훤에게서 유래되었다. 견훤은 필사적으로 탈출한 왕건이 앞산의 안지랑골에 있는 안일암 근처에 은신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안일암까지 수색했다. 이에 왕지렁이의 후손이라 전해지는 견훤이 왔다고 해서 '왕지렁이'가 되었다가 발음의 편의상 '안지랑이'로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앞산으로 탈출한 왕건은 계속해서 은적사 부근의 자연 동굴에 은신하여 숨어 지냈다. 그 굴을 '은적굴(隱跡窟)'이라고 했는데 후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사찰이 '은적사(隱跡寺)'가 된다. 그리고 왕건이 좀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쉬어 갔다는 유래를 가지는 '안일사(安逸寺)'가 있다. 견훤 군사가 앞산 안일암 인근까지 들이닥쳐서 왕건은 안지랑골 정상 인근에 있는 동굴로 급히 피신했는데 왕이 피신했던 굴이라 해서 '왕굴(王窟)'이라고 불린다.

왕굴. 오동욱 제공
왕굴. 오동욱 제공

왕건은 왕굴에 머무르다가 앞산을 넘어 반대편에 있는 '임휴사(臨休寺)'로 숨어들었는데 임휴사는 왕건이 잠시 머물며 휴식하고 간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에는 왕선고개, 왕선재가 있다. 왕건이 도주하다가 이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숨을 돌리고 몸과 마음을 수습하고, 새로운 결의를 세우게 되었다고 해서 '왕선고개'로 불린다. 대구지역을 무사히 탈출한 왕건은 성주, 김천 지역을 거쳐 고려 수도인 개경으로 돌아가 훗날 후삼국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게 된다.

이처럼 대구에는 왕건과 견훤 간의 공산전투에서 유래된 스토리와 지명이 많이 존재한다. 이 전설이 다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만큼 공산전투가 대구 일대의 지명에 끼친 영향이 크다는 것은 분명하다. 관련된 지명 자체가 하나의 역사책이다. 대구에는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팔공산 동수전투의 흔적을 따라 걷는 길인 '팔공산 왕건 길'이 조성되어 있다. 총 길이 35km에 이르는 팔공산 왕건길의 출발점은 바로 신숭겸 장군 유적지다. 팔공산 왕건 길은 왕건과 신숭겸의 이야기가 살아 있는 역사적 트레킹 코스이다.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