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교수의 별별시선] 감당할 수 있는 것만 하면서 살자

입력 2026-04-10 1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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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전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작가·전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심금을 울리는 역대급 영화 대사들이 있다. 네 개쯤 되는 데 등장한 순서대로 보면 이렇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 주인공이 남자에게 자기는 앞으로 어떡해야 하냐고 묻는다. 남자 주인공은 세상에서 가장 시시한 말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대꾸한다.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종종 써먹는데 상대의 분노 게이지를 끌어올릴 때 이만한 게 없다.

'카사블랑카(1942)'에서 외박한 애인에게 여자가 따진다. 어제 뭐했느냐는 바가지에 남자는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그렇게 오래된 일은 기억하지 못한다." 대화를 차단하고 싶을 때 최고다. '대부(1972)'에서 말론은 볼에 사탕을 문 것 같은 우물거리는 말투로 말한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자는 세상에 많지 않아 활용도는 다소 낮다.

'스타워즈(1980)'에서 시커먼 철가면이 신참 사무라이에게 말한다. "내가 네 애비다." 말 자체보다 상황이 만들어 낸 명대사다. 이후 한동안 귀에 쏙 들어오는 게 없었는데 30년 좀 넘게 지나 하나를 추가했다. 이번에는 한국 영화다. '신세계(2013)'에서 황정민은 아끼는 동생이자 조직에 침투한 경찰 스파이에게 묻는다. "감당할 수 있겠냐?" 단순히 싸움 실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자기 자리를 이어받아 이 세계를 버틸 수 있겠느냐는 중의적인 뉘앙스로 쓰여 상당히 묵직하다.

◆역사물은 창작자의 객관적 자기 평가 후에야 가능한 장르

"감당할 수 있겠냐?"는 다면적인 동시에 상당히 성찰적이다.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의미로도 읽히고 그래서 종종 내가 나에게 활용한다. 새 책을 쓸 때 자문한다. 감당할 수 있을까 혹은 내가 이 소재를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쓸 수 있을까, 뭐 이런 약간은 교만한 질문과 생각으로 글쓰기를 시작한다. 타인에 대해서 이 말을 쓸 때는 좀 많이 엄격하다.

수준이 떨어지는 책을 읽으면 이렇게 말한다. "저자가 감당할 수 없는 책을 썼네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모욕적이고 가혹한 평가다. 해서 어지간해서는 잘 쓰지 않는다. 상대를 원수로 돌릴 생각이 없으면 절대 안 쓴다. 얼마 전 이 표현 말고는 대체 불가능한 영화를 봤다. 2024년 개봉한 '희망의 나라'다.

10.26 대통령 시해 사건 주요 가담자 재판 이야기다. 가담자 중 유일하게 군인이 한 명 있었는데 군사 재판의 경우 1심이 끝이다. 이걸 3심으로 돌리려는 한 정의로운 변호사가 등장한다. 여기까지 설정은 좋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감독이 그 역사적인 사실을 '감당'할 실력이 전혀 아니었던 거다. 그래서 영화 내내 '감히 군바리에게 쌍욕 하는 변호사'라는 캐릭터만 보인다.

각자의 사정과 고민은 없고 선과 악의 대결만 유치하게 펼쳐진다. '감당할 실력'에 대한 내 정의는 이렇다. 일단 전두환을 한 시간 내내 비판할 수 있는 역사적 지식이 있어야 한다. 이어서 전두환을 역시 한 시간 내내 지지하고 두둔할 수 있는 지식도 필요하다. 이 균형이 맞아야 역사물을 '감당'할 수 있다. 인간은 1차원적인 존재가 아니라 선악이 혼재한 고도로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르면 말을 말고 자신이 없으면 하지 마라

관객 1천5백만을 돌파한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의 이야기다. 세조와 단종의 이야기는 정사와 야사 모두 흥미롭지 않은 게 없다. 허물어지지 않는 기본은 세조 = 악당이다. 예전에 읽었던 흥미로운 역사 칼럼이 있다. 진보를 넘어 상당히 왼쪽으로 치우친 학자였는데 그 사건에 대한 놀라운 시각을 보여줬다.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자리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충격적인 의견이다.

정황상 어차피 왕좌는 세조였다는 얘기다. 놀랐고 한편으로 공감했던 이유는 내 생각도 비슷해서였다. 문종이 현실적이었다면 신하들에게 어린 아들의 보위를 부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 수양대군을 불러 어떤 경우에도 내 자식만큼은 죽이지 말아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을 것이다.

적어도 이런 수준의 질문을 '행복의 나라' 감독은 영화에서 했어야 한다. 그게 안 되니 산으로 가고, 들로 퍼지고, 해양에서 난파한 끝에 죽하고 밥 사이에서 영화가 실종된 거다. 의욕과 실력 사이의 어마어마한 크레바스가 빚은 참극을 보면서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만 하고 살자는 좌우명을 한 번 더 곱씹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