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강우 시인·소설가
그림에 특출한 재능이 있는 윤에게 미술 교사는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권했다. 하지만 윤은 선생님의 권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머니는 지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동생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다. 윤도 아르바이트를 관둘 수 없었다. 어머니는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지만 윤은 어머니의 짓무른 눈을 보면서 "아녜요. 어머니, 그림은 나중에 그려도 돼요." 라고 말했다. 윤은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된 때문이었다. 여섯 살이나 어린 동생도 돌봐야 했다. 다행히 병역판정검사에서 생계 사유가 인정돼 전시근로역 판정을 받은 윤은 물류센터의 배달기사로 취직했다.
윤의 어깨는 멍이 든 것처럼 거무죽죽했다. 하루 두세 번은 5층까지 걸어서 배달했다. 지하실에 이르는 계단은 왜 그렇게 가파른지 생수 서너 박스를 옮기고 나면 다리가 후들거렸다. 결국 사달이 났다. 배달하던 박스를 떨어뜨렸는데 하필이면 개당 가격이 10만원을 상회하는 수입 식기였다. 그럴 경우 배상액을 월급에서 제하는 것으로 계약서에 명기돼 있었다. 근무평점이 떨어질 건 불문가지였다. 그는 고객에게 개인적인 보상을 제안했다. 당신 월급으로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걸 깨뜨려? 고객이 내지른 말이 그의 뼈를 때렸다. 거듭 용서를 빌었지만 고객은 끝내 고객센터에 신고했다. 근무평점이 하락하는 것보다 차가운 세태가 그를 아프게 했다. 심신이 피폐해진 윤은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윤이 전전한 직종은 스무 개가 넘었다. 식당 주방보조, 창고 물품정리, 공사장 막일, 과수원 농약 살포, 빌딩 경비, 채낚기어선 오징어잡이, 도로포장 차선도색, 이삿짐센터 인부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가 벅찰 정도였다. 그러니 본격적인 그림 공부는 언감생심이었다. 전시회 한 번 가기가 아버지 산소 가는 것보다 어려웠다. 그 와중에도 윤은 꿈을 잃지 않았다. 틈날 때마다 크로키와 데생을 했다. 어떤 일을 하든 그의 필수품은 작은 무지노트와 연필이었다. 그림 공부를 위해선 잠과 휴식 시간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그는 두 아이의 아빠가 됐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 아이들은 취직을 하고 결혼을 했다. 윤은 그제야 어깨를 폈다. '지나온 풍경' 이란 제목으로 첫 전시회를 기획하던 그때 윤의 나이는 66세였다. 유화로 그린 작품들의 소재는 다양했다. 눈 밝은 관객이라면 그림만 봐도 그의 이력을 짐작할 터였다. 담당 큐레이터가 리플릿에 기입할 한 줄짜리 부제목을 물었을 때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뗐다. "이 그림들은 온전히 나라는 튜브를 짜서 그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