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성 0% 인증 체계의 역설...행정 편의주의에 야생동물기피제 단종 위기
전국 농가, 멧돼지 등 야생동물에 무방비 노출 우려
정부가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등 멧돼지와 같은 야생동물 확산을 막기 위해 설치했던 1천600km에 달하는 광역울타리를 단계적으로 철거하기로 했다. 철거된 빈자리는 야생동물 기피제와 위성항법장치(GPS) 포획트랩 등으로 메우겠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정작 방역 현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 할 동물기피제가 현실과 동떨어진 불합리한 규제 장벽에 막혀 시장에서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부처 간 엇박자와 획일적인 행정 편의주의 탓에,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국가 방역망과 농작물 보호 시스템에 치명적인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매일신문 취재와 기후에너지환경부 등의 자료를 종합하면, 지난 2019년 경기 연천군에서 ASF가 최초 발생한 이후 정부는 1천100억원 이상의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전국에 철제 광역울타리를 둘러쳤다.
그러나 이 광역 금속 울타리는 야생동물의 이동을 단절시켜 생태계 파편화를 심화시킨다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특히 지난 2023년 겨울철에는 이동로가 막혀 폭설에 고립된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 산양 750마리가 떼죽음을 당하는 비극까지 벌어지며 그 한계와 부작용이 여실히 드러났다.
비판이 거세지자 정부는 지난해 11월 생태연결성이 높은 국립공원 등부터 울타리를 단계적으로 철거하겠다고 발표했다. 울타리를 걷어내는 대신 실시간 감시와 포획트랩 배치, 그리고 기피제 살포 등을 통해 방역의 빈틈을 메우겠다는 대안도 함께 제시했다.
문제는 정부가 핵심 대안으로 지목한 바로 그 야생동물 기피제가 당장 올해 중순이면 대한민국에서 법적으로 유통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이다.
동물기피제는 멧돼지나 고라니의 농경지 침입을 줄이고 축사 주변에 보이지 않는 냄새 울타리를 치는 등 현장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지자체와 농가 역시 ASF와 야생동물 농작물 피해가 일상화된 현 상황에서 동물기피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온 상태다.
하지만 최근 동물기피제가 살생물제품 인증 체계로 편입되면서, 서류상 관리 대상 품목이 됐을 뿐 정작 인증을 마친 제품은 현재 단 한 개도 없는 모순적인 공백 상태에 빠졌다.
현행 살생물제품 인증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급성독성, 반복투여독성, 환경유해성, 유효성 등 수십 가지 시험 항목을 기준(GLP)에 맞춰 수행해야 한다. 이 평가 틀은 애초에 유해 생물을 죽이는 용도인 살균제나 살서제에 맞춰 설계된 것이다.
즉, 동물을 죽이지 않고 단순히 냄새 등을 통해 행동만 돌려세우는 야생동물 기피제의 본질적인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동일한 독성 관점과 잣대를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안전한 제품만 살아남게 하겠다는 제도적 취지는 타당하지만, 평가 기준과 비용 구조가 기피제의 현실과 전혀 맞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위험한 제품을 제외하는 것을 넘어서 필요한 제품까지 통째로 밀어내는 부작용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대부분이 영세한 중소기업인 기피제 제조사들에게 이러한 기준은 안전성 확보를 넘어 사실상 시장 진입 자체를 가로막는 철벽이다. 시험 항목 하나하나에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에 이르는 막대한 비용과 오랜 기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수많은 관련 업체가 인증을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사업 포기를 고민하는 등, 시장 전체가 줄도산 위기에 내몰리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다.
동물기피제 제품의 제조 유예기간은 이미 지난해인 2025년 12월 31일부로 끝이 났으며, 제품 판매에 대한 유예기간 오는 6월 30일이면 전면 종료된다. 인증 유예기간이 완전히 끝나면, 현재 인증을 통과한 제품이 없는 동물기피제 시장은 법적으로 소멸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전국 지자체가 필수적으로 집행해 오던 방역 및 야생동물 피해 저감 사업은 전면 중단된다.
축산 농장 출입로나 야생멧돼지 이동 경로에 울타리 및 포획틀과 함께 병행 사용돼 오던 기피제가 사라지면, 농장이나 도심과 야생동물을 부드럽게 분리해 주던 '행동 기반 완충 수단'을 잃게 되는 셈이다.
방역 전문가들은 기피제의 공백이 결국 ASF의 전국적 확산 위험과 천문학적인 농작물·임산물 피해로 직결될 수 있다고 강하게 경고한다.
방역업계 관계자는 "현재의 과도한 살생물제품 인증 요건이 개선되지 않은 채 기피제마저 제도 밖으로 밀려난다면, 대한민국의 방역 구조는 또다시 '죽이는 방역'과 생태계를 단절시키는 '철조망 방역'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지 외에는 남지 않게 돼 과거의 실패를 답습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정부 부처 간의 정책 엇박자를 해소하고, 기피제의 공익적 기능과 시장 현실을 반영해 제품 승인 유예기간을 추가로 연장하는 동시에 기피제에 걸맞은 현실적인 효능 시험 방법 등 제도 전반에 대한 수정이 시급하다"고 알렸다.
한편, 문제에 대한 답변을 듣기 위해 환경부 화학제품관리과에 수차례 연락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