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택시 판 돈 3500만원… 10평 낡은 가게서 피어난 '생존 본능'
홍보비 '0원'의 기적… 114 안내원 단골로 만든 '맨주먹 마케팅'
50도 찜통차서 에어컨 끄고 버텼다… 타협 없는 '품질 경영'
1991년 3월 13일, 경북 구미시 송정동의 한 낡은 상가 1층. 실면적 33㎡(약 10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 '교촌통닭'이라는 투박한 간판이 내걸렸다. 보증금 1천500만원에 월세 40만원. 주방 집기조차 제대로 갖추기 버거웠던 이 영세 사업장이, 훗날 매출 5천억원(2025년 기준)을 넘는 대한민국 프랜차이즈 업계를 뒤흔들 'K-치킨'의 발원지가 될 것이라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창업주 권원강 회장(당시 40세)에게 교촌은 장밋빛 '꿈'이 아닌 처절한 '생존'이었다. 젊은 시절 부친의 소금 사업 실패 이후 판촉물 판매, 성냥개비 납품, 과일 행상, 해외 건설 노동자 등을 전전하며 쓴맛을 봤다. 8년간 생계를 책임졌던 개인택시 면허를 매각해 마련한 3천500만원은 그가 쥐어짜 낸 마지막 자본금이자, 가족의 생명줄이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절박함', 그것은 교촌 특유의 치열한 경영 DNA를 형성하는 가장 강력한 자산이 됐다.
◆ 114 안내원을 영업사원으로 만들다
창업 초기 교촌이 직면한 가장 큰 리스크는 브랜드 인지도의 부재였다. 대형 프랜차이즈들이 TV 광고를 쏟아붓던 시절, 자본금 3천500만원짜리 가게에 마케팅 예산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하루 매출이 전무한 날이 이어지며 폐업의 공포가 엄습했다. 이때 권 회장이 선택한 전략은 전통적인 광고가 아닌, 114 안내 서비스를 활용한 '게릴라 마케팅'이었다.
그는 가게가 한가한 시간이면 전화기를 들었다. 하루 수십 차례 114에 전화를 걸어 "교촌통닭 전화번호가 몇 번입니까?"를 문의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 검색 한 번이면 원하는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지만, 당시에는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뒤적이거나 114에 전화를 걸어 상호를 묻는 것이 일상이던 시절이었다.
권 회장은 이 점을 파고들었다. 지역 정보의 허브인 안내원들에게 브랜드를 각인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 판단한 것이다.
수화기 너머로 "또 전화했느냐"는 핀잔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단순한 반복이 아니었다. 그는 안내원들의 뇌리에 상호를 심는 작업이 곧 잠재 고객 확보의 지름길이라 확신했다.
전략은 적중했다. "도대체 거기가 어디기에 하루 종일 전화를 합니까? 우리도 맛이나 봅시다." 114 안내원들의 호기심은 곧 실구매로 이어졌고, 이는 구미 지역 내 강력한 '구전(口傳) 마케팅'의 기폭제가 됐다. 자본의 열세를 집요한 실행력으로 극복한 교촌의 첫 번째 '마케팅 솔루션'이었다.
◆ "내 몸보다 치킨 온도가 먼저"
교촌이 단기간에 지역 맛집을 넘어 프랜차이즈로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타협 없는 '품질관리' 원칙이 있었다. 1990년대 초반, 배달 서비스의 핵심 경쟁력은 '신속성'이었다. '총알 배달'이 미덕이던 시절, 권 회장은 '온도 유지'라는 본질적 가치에 주목했다.
한여름 낮 기온이 35도를 오르내리던 구미의 오후. 배달용 봉고차 내부 온도는 50도를 웃돌았다. 하지만 권 회장은 시동을 걺과 동시에 에어컨 가동을 중단하고 창문을 굳게 닫았다. 에어컨 냉기에 갓 튀긴 치킨이 식어 맛의 퀄리티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운전대를 잡은 손이 땀에 미끄러지고,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탈진 상태가 이어졌지만 원칙을 꺾지 않았다.
"내 몸 시원하자고 에어컨을 틀면 손님은 식은 치킨을 먹어야 한다." 땀범벅이 된 채 배달된 따뜻한 치킨은 고객에게 단순한 음식이 아닌 '진심'으로 전달됐다. 고객들은 "왜 이렇게 땀을 흘리느냐"며 놀라워했고, 그 미련한 정직함에 지갑을 열었다.
하루 1~2마리에 불과했던 판매량은 입소문을 타고 급증해 일 100마리를 넘어서기에 이르렀다. 당장의 편의보다 고객 경험을 최우선시한 이 '미련한 원칙'은 훗날 교촌이 업계 1위를 수성하는 핵심 경쟁력인 '정도(正道) 경영'의 뿌리가 됐다.
◆ 폐점률 0%가 증명한 '상생' 신화
권 회장의 리더십은 화려한 성공학보다 처절한 실패학에 기반한다. 20대 시절, 친구와 동업했던 판촉물 사업은 미수금 문제로 1년 만에 문을 닫았고, 트럭 과일 행상은 재고 관리 실패로 빚만 남겼다. 하지만 그는 이 실패들을 '악성 부채'가 아닌 '투자 자산'으로 삼았다.
그는 공자의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를 재해석해 경영 철학으로 삼았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세 사람 모두가 스승이다. 좋은 사람에게선 배울 점을 찾고, 나쁜 사람의 행태야말로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를 배울 수 있는 최고의 스승"이라는 역발상이다.
이는 가맹점과의 상생 관계 구축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과거 사업 실패 과정에서 겪었던 갑질과 불공정 관행을 답습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철저한 '영업권 보호 정책'으로 이어졌다. 본사의 수익을 위해 무분별하게 점포를 늘리는 대신, 기존 가맹점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거리 제한'을 엄격히 적용했다.
그 결과 교촌은 프랜차이즈 업계 평균(약 12%)을 훨씬 밑도는 '0%대 폐점률'이라는 경이적인 수치를 기록하며 '가맹점이 살아야 본사가 산다'는 상생 모델을 완성했다.
◆ 절박함이 만든 'K-치킨'의 표준
권 회장은 "인생의 그래프는 바닥에서 시작할수록 상승의 폭이 크다"고 강조한다. 가진 것 없이 시작했기에 잃을 것이 없었고, 그 절박함이 혁신의 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1991년 구미의 10평 가게에서 "오늘 딱 한 마리만"을 기도하던 그 간절함은 이제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K-치킨'의 표준이 됐다.
교촌의 지난 35년은 한 개인의 입지전적인 성공담을 넘어, 위기의 시대에 기업이 갖춰야 할 '기업가 정신'의 정수를 보여준다.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난 이 치열한 생존기는, 오늘도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고 있을 수많은 '미생(未生)'들에게 건네는 묵직한 위로이자 희망의 증거다.
[그래픽 자료] 숫자로 본 교촌의 '무모한 도전'
1. 10평 (33㎡): 1991년 3월, 구미 송정동 1호점의 실평수. 주방과 테이블 4개가 전부였던 이 작은 공간이 K-치킨의 발원지가 됐다.
2. 3천500만원: 권원강 회장이 개인택시 면허를 판 돈으로 마련한 전 재산이자 창업 자금. 실패하면 가족의 생계가 무너진다는 배수진(背水陣)이었다.
3. 50℃: 배달 봉고차의 한여름 내부 온도. "에어컨을 틀면 치킨이 식는다"며 창문을 닫고 배달한 권 회장의 '미련한 진심'을 상징하는 숫자.
4. 0원: 창업 초기 마케팅 예산. 돈이 없어 무작정 114에 전화를 걸어 상호를 노출시킨 '맨주먹 마케팅'은 훗날 교촌의 성장 동력이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