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님은 마음으로, 몸은 하와이로"… 제사상 걷어치우고 공항 가는 가족들

입력 2026-02-15 17:28:53 수정 2026-02-15 19: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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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급호텔 '명절 투 고' 서비스 조기 매진… "전 부칠 시간에 호캉스 즐겨요"

설 연휴 첫날인 14일 제주국제공항이 제주를 찾은 귀성객과 관광객으로 북적이고 있다. 연합뉴스
설 연휴 첫날인 14일 제주국제공항이 제주를 찾은 귀성객과 관광객으로 북적이고 있다. 연합뉴스

"작년 설에는 시댁에서 전 부치느라 허리 한번 못 폈는데, 올해는 시부모님이 먼저 '그냥 여행이나 다녀오자'고 하시더라고요. 이게 꿈인가 싶습니다." (서울 송파구 거주, 주부 박모씨·38)

설 연휴를 사흘 앞둔 12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출국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양손에 면세점 쇼핑백을 들고 들뜬 표정으로 탑승 수속을 기다리는 이들의 모습에서 '명절 스트레스'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과거처럼 선물 보따리를 이고 고향으로 향하는 귀성객보다 여행 가방(캐리어)을 끄는 '해외 여행족'이 더 눈에 띄는 2026년의 설 풍경이다.

유교 문화의 본산이었던 한국의 명절 풍속도가 급격히 변하고 있다. '조상 모시기'라는 의무감 대신 '가족 간의 휴식'을 택하는 실리주의가 정착하면서다.

◆ 제사상 대신 기내식… "조상님도 이해하실 것"

인천국제공항공사에 따르면 이번 설 연휴 기간(14~18일) 하루 평균 공항 이용객은 23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역대 설 연휴 중 최대 규모다. 단거리 노선인 일본, 동남아는 물론 미주, 유럽 등 장거리 노선 예약률도 95%를 상회한다.

공항에서 만난 직장인 최모(45)씨는 "부모님 돌아가시고 형제들끼리 상의해 제사를 없앴다"며 "형수님, 제수씨 눈치 안 보고 다 같이 베트남 다낭으로 떠난다. 조상님도 자손들이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지내는 걸 더 좋아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실제로 데이터 컨설팅 기업 피엠아이가 최근 전국 20~69세 남녀 3,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번 설에 차례를 지내지 않겠다'는 응답은 64.2%에 달했다. 지난해(49%)와 비교하면 불과 1년 사이 15%포인트 이상 급증한 수치다. 제사가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된 시대의 단면이다.

◆ 전은 사 먹고, 남은 시간은 호텔에서… '명절 해방'

차례를 지내더라도 풍경은 예전과 다르다. 하루 종일 기름 냄새를 맡으며 음식을 준비하던 모습은 옛말이 됐다. 백화점과 특급호텔에서 판매하는 프리미엄 상차림 세트인 '명절 투 고(To-go)' 서비스는 예약 시작 일주일 만에 완판됐다.

서울 시내의 한 5성급 호텔 관계자는 "30만~50만 원대의 고가 상차림 세트가 가장 먼저 동났다"며 "가사 노동을 돈으로 해결하고, 남은 시간을 온전히 가족과의 대화나 휴식에 쓰겠다는 고객들의 니즈가 반영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호텔에서 명절을 보내는 '설캉스(설+호캉스)' 족도 늘었다. 서울과 부산, 제주 등 주요 관광지 특급호텔의 연휴 기간 객실 점유율은 이미 90%를 넘겼다. 호텔업계는 며느리들을 겨냥한 스파 패키지나, 아이들을 위한 키즈 프로그램 등을 내세워 '명절 대목'을 누리고 있다.

◆ "불효가 아니라 변화"… 세대 갈등 줄고 이해 폭 넓어져

과거에는 이런 변화가 고부 갈등이나 부부 싸움의 불씨가 되곤 했지만, 최근에는 6070 부모 세대가 먼저 간소화를 제안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하는 '액티브 시니어'들이 늘어난 덕분이다.

한 사회학과 교수는 "형식에 얽매이기보다 가족 간의 유대와 행복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명절의 의미가 재편되고 있다"며 "제사라는 의례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를 새로운 의례로 받아들이는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2026년 병오년 설, 대한민국은 지금 '제사 없는 명절'이라는 새로운 실험을 거치며 가장 합리적이고 행복한 가족 문화를 찾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