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상고사의 난제인 자료 결핍과 강단 사학의 폐쇄적 연구 자세
『조선왕조실록』의 초기 기록에 의하면 『고조선비사』, 『삼성기』 등의 책명이 등장한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직접 손수 기록한 고조선 등 한국 상고사 관련 자료가 한양조선 전기까지 전해왔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런 책들을 만나볼 수 없다. 단지 삼국의 고대 역사를 중점적으로 기술한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전할 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세 가지라고 본다.
첫째 일본은 35년 동안 우리나라를 식민통치했는데 이때 신라사를 한국사의 출발점으로 삼은 『조선사』 35권을 새로 편찬했다. 이 과정에서 자료수집을 핑계로 전국 방방곡곡에 숨겨진 엄청난 양의 고대사 자료를 전부 강제 수거하여 말살했다.
둘째는 명, 청 시대에 사대를 하면서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고 우리 스스로 상고사 자료를 폐기 처분했다. 고조선은 발해만의 북경 일대를 중심으로 발해유역을 지배한 강대한 국가였지만 명, 청 시대 한양조선은 저들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황제국인 명, 청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의 보잘것 없는 제후국인 한양조선이 중국 북경의 원래 주인이었다는 사실이 달갑지 않게 여겨졌다.
그래서 이때 중국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발해조선을 지우는데 앞장섰고 한양조선은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고 『고조선비사』, 『삼성기』 등 우리 상고사 자료들을 수거하여 민간에서 볼 수 없도록 했다. 그러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 초기 기록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셋째는 병란으로 인한 문헌의 유실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데 중국의 한족들은 동이족에 대한 역사 콤플렉스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저들이 우리나라를 침략하면 영토를 공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반드시 많은 역사자료를 빼앗아갔다. 특히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켰을 때 우리의 소중한 많은 문헌들이 유실되었고 몽고가 고려를 침략했을 때도 전화에 많은 서적을 잃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한국에 상고사 자료가 결핍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따라서 한국의 상고사 연구는 국내의 제한된 자료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자료의 폭을 확 넓혀서 중국은 물론 일본, 몽골, 중앙아시아, 베트남 등 범동이문화권으로 확대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 강단사학의 연구 자세를 돌아보면 너무 폐쇄적이다.
광복 이후 80년 세월이 흘렀다. 지금 강단사학은 고조선과 관련하여 일제 때 식민사학자가 제시한 몇 개의 자료를 제외하고 어떤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거나 발견한 것이 있는지 묻고 싶다.
◆동양 사료를 3만6천여 책 8만 권으로 집대성한 『사고전서』
『사고전서』는 어떤 책인가. 청나라 때 건륭황제가 주도하여 중국 5,000년 역사상의 문헌을 집대성하여 편찬한 책으로 3,800명이 필사 작업에 참여했다. 건륭 47년(1782) 초고가 완성되었고 건륭 57년(1792) 전부 완성되었다. 『사고전서』 편찬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문화사업이다. 만리장성, 경항(京杭) 운하와 함께 중국의 3대 기적으로 평가된다.
경(經), 사(史), 자(子), 집(集) 4부분으로 나누어 편찬했기 때문에 전서(全書) 앞에 사고(四庫)라는 이름을 붙여 『사고전서』라고 한다. 모두 3천462종의 도서, 3만6천여 책, 약 8만권이 수록되어 있다. 개인의 저작과 달리 국가에서 황제가 직접 편찬작업을 주도했기 때문에 『흠정사고전서(欽定四庫全書)』라고 한다.
『사고전서』는 편찬작업이 완성된 이후 건륭황제가 7부를 필사하여 전국 각지에 나누어서 보관하도록 명했다. 먼저 4부가 필사되어 북경 자금성 문연각(文淵閣), 요녕성 심양 문소각(文溯閣), 하북성 승덕 문진각(文津閣)에 보관되었다. 뒤에 다시 3부를 필사하여 양주의 문회각(文滙閣), 진강(鎭江)의 문종각(文宗閣), 항주의 문란각(文瀾閣)에 각각 보관하였다.
1948년 장개석이 자금성 문연각에 보관되어 있던 『사고전서』를 대만으로 가져와서 대만국립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가 1983년 대만 상무인서관에서 최초로 영인 발행함으로써 세계에 널리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뒤이어 중국에서도 문란각본, 문진각본 『사고전서』가 연이어 영인되어 나왔다. 『사고전서』가 널리 보급되었지만 워낙 방대하여 연구할 엄두를 못 내는 것이 문제였다. 지금은 다행히 모두 전산화되어 누구나 검색작업이 가능하다. 『사고전서』의 보급과 전자화는 자료 결핍에 허덕이는 한국 상고사 연구에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사고전서』와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차이점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23년(1145) 왕의 명을 받아 김부식이 편찬했다. 중국의 정사 기전체 형식을 본떠 본기, 열전, 지(志), 연표로 구성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책명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했고 특히 신라사를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삼국사기』에서 고조선과 관련된 내용은 "신라는 고조선의 유민이 세운 나라이다"라는 기록이 유일하다. 그러므로 『삼국사기』로 삼국시대 이전 고조선, 부여, 삼한 등의 한국사를 연구하는 작업은 불가능하다.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때 승려 일연(1206~1289)이 개인적으로 저술한 책인데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신라로부터 한국사를 시작한 것과 달리 중국의 『위서(魏書)』를 인용하여 고조선으로부터 한국사의 첫 장을 열었다.
그리고 삼한, 북부여, 말갈, 발해사 등을 간단하게나마 함께 다루고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유교 사대주의자 김부식 『삼국사기』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한 분명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저술된 책이라고 본다.
다만 『삼국유사』에 담긴 고조선 기록은 단지 한 페이지에 불과하다. 2,000년 장구한 고조선 역사가 짧은 한 장의 문장에 담기다 보니 고조선의 발상지가 어디인지, 한사군의 낙랑군은 한반도에 있었는지 대륙에 있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일연이 고려의 국사를 역임했다지만 지금 경상북도 군위군에 있는 인각사(麟角寺)라는 절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방의 산사에서 승려의 신분으로 자료를 모아 상고시대 역사서를 저술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일연의 『삼국유사』만으로 한국 상고사를 연구한다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사고전서』는 한국사를 전문으로 다룬 역사서는 아니다. 그러나 『사고전서』는 청나라 이전 중국 반만년 역사자료를 집대성한 책이므로 그 안에는 발해조선을 비롯한 고대 한국 관련 자료가 산적해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사고전서』에 1,500년 전 남북조시대 유신(庾信)이란 학자가 쓴 모용 선비족 두로공신도비명이 실려 있다. 거기에 "조선이 건국 했고 고죽이 임금이 되었다. 땅은 고류(高柳)라 호칭하고 산은 밀운산(密雲山)이라 부른다. 요양(遼陽)은 조(趙)나라가 분열해 가져갔고 무수(武遂)는 진(秦)나라가 나누어 가졌다.(朝鮮建國 孤竹為君 地稱髙栁 山名密雲 遼陽趙裂 武遂秦分)"라는 기록이 나온다. 선비족의 묘비명에 고조선이 첫 머리에 등장한다는 사실이 몹시 놀랍다.
한국의 강단사학은 고조선은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자료는 고조선이 고죽국과 함께 등장한다. 송나라 때 낙사(樂史)가 쓴 『태평환우기』에는 하북도 평주 노룡현이 고죽국의 수도이자 고조선의 옛 터전이라고 말했다.
산해경 해내서경에 "안문산은 고류의 북쪽에 있다.(雁门山 在高柳北)"라고 보인다. 중국 학계에서는 산서성 북쪽 양고현(陽高縣) 일대가 옛 고류의 중심지역이라고 본다. 고류는 고조선의 서쪽 경계를 연구하는데 참고가 된다.
밀운산은 어디인가. 한반도나 만주에는 밀운산이 없다. 북경시 동북 쪽 송나라 때까지 조선하(朝鮮河)로 불렸던 현재의 조하(潮河) 부근에 밀운구가 있다.
『북경시밀운현지(北京市密雲縣志)』에 "산이 높아 항상 운무(雲霧)가 자욱하기 때문에 운무산, 또는 구름이 빽빽하다는 뜻으로 밀운산이라고 불렀으며 그 부근에 설치한 현을 밀운현이라 부른다"라고 했다. 이는 조선하 부근에 밀운산이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한국과 중국의 역사학계는 현재 요녕성 요하 동쪽에 있는 요양시를 고대의 요양으로 인식해왔다. 그러나 1,500년 전 유신은 요양이 "조나라에 의해 분열되었다."라고 말하였다. 요녕성 동쪽에 있는 현재의 요양이 고대의 요양이라면 하북성 남쪽 한단시(邯鄲市)에 수도가 있던 조나라가 중간에 연나라를 뛰어넘어 이를 빼앗아가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이는 수, 당 이전의 요수와 요양은 하북성에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에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樂浪郡 遂城縣 有碣石山)"라고 하였다. 수성현은 낙랑군 25개 현 중의 하나인데 식민사학은 낙랑군이 한반도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고 믿었으므로 북한의 수안(遂安)을 낙랑군 수성현으로 비정했다. 일부 민족사학자는 하북성 난하 유역 창려현을 낙랑군 수성현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태평환우기』에는 수성현은 "전국시대의 무수현이다.(戰國時 武遂縣也)" "남역수가 수성현의 경계를 자나간다(南易水 歷縣界)"라고 말했다. 이는 현재 하북성 보정시 역수 유역에 있는 수성진(遂城鎭)이 낙랑군 수성현이고 전국시대의 무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수성현이 북한의 수안이라면 진(秦)나라가 빼앗아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낙랑군 수성현이 하북성 보정시 역수 유역에 있었다면 섬서성 서안에 수도를 둔 진나라의 동쪽 접경지대가 되므로 진나라가 빼앗아갔다는 논리가 가능하다.
위에 인용한 두로공신도비명은 글자는 24자 밖에 안 된다. 하지만 이를 하나하나 분석하면 고조선의 건국과 강역, 고조선과 선비족, 고조선과 고죽국, 고조선과 전연(前燕)의 상관관계를 밝혀낼 수 있는 천금 같은 자료이다. 『사고전서』에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를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는 볼 수 없는 이런 자료들이 산적해 있다.
◆『사고전서』와 『환단고기』의 차이점
한국의 강단사학은 패수는 청천강이고 요동성과 안시성은 현재의 요녕성 요하 동쪽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환단고기』에서는 패수는 북경시 북쪽의 조하(潮河)이고 요동성, 안시성은 하북성 당산시 부근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과연 어떤 주장이 맞을까.
『사고전서』를 통해서 교차검증을 해보면 지금의 조하가 고대의 조선하였고 안시성, 요동성이 모두 유주(幽州) 소속으로 지금의 북경시 부근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환단고기』의 내용이 역사 사실에 부합된다.
그러나 『환단고기』에는 후대의 조작된 흔적이 분명한 사료적 가치가 떨어지는 내용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환단고기』는 국내에서 논란이 많고 강단사학으로부터 위서 취급을 받는다. 더구나 그런 자료가 국제적으로 통용되기는 어렵다.
『사고전서』는 『환단고기』와 달리 그 사료적 가치를 세계가 공인한다. 한국에서 한국인이 자기 역사를 미화하기 위해 만든 책이 아니고 중국에서 고대 중국인이 편찬한 책이므로 객관성이 확보된다. 사대, 식민사관을 청산하고 『사고전서』로 한국사를 재정립한다면 누가 그것을 부정하겠는가.
◆『사고전서』로 한국 상고사 혁명해야
오늘날 한국인은 한반도에 터전을 두고 살아가지만 지난 날 우리 조상들은 발해유역을 무대로 활동하였다. 중국 수도 북경이 고조선, 고구려의 영토였다.
중국 대륙이 우리민족의 생활터전이었으므로 고대 중국 문헌을 집대성한 『사고전서』 가운데 우리민족의 지난 역사가 담겨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지금 우리민족의 상고사를 연구하는데 가장 현명한 선택은 세계가 인정하는 검증된 객관적인 사료인 『사고전서』를 활용하는 것이다. 『사고전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환단고기』를 폭넓게 활용하여 한국의 상고사, 고대사를 재정립한다면 국내의 강단사학도 일본이나 중국 학계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번에 정부 업무 보고 때 이재명 대통령이 동북아역사재단 박지향 이사장을 향해 "『환단고기』는 문헌이 아닌가"라고 질문을 던졌다가 사회적으로 크게 논란이 되었다. 이 대통령이 만일 "『사고전서』는 문헌이 아닌가. 왜 연구하지 않는가"라고 질문했다면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는 계기가 되었을 것인데 그러지 못하고 결국 흐지부지되고 만 것이 아쉽다. 이 대통령은 여기서 포기하지 말고 『사고전서』로 한국 역사학을 혁명하는 용단을 내려주기를 촉구한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