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가난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입력 2026-01-08 10:5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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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가난의 명세서
김나연 지음/ 글항아리 펴냄

영화평론가 백정우

가난은 죄가 아니라, 단지 불편할 뿐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불편한 정도가 이만저만 아니라는 거다. 가난은 삶을 궁핍하게 만들 뿐 아니라 자신과 가족에게 굴욕감을 안겨주고 자존감을 갉아먹기 마련. 의식주의 불편함은 물론이고, 염치없는 일의 연속이기 십상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빠져나오기 쉽지 않은 것이 가난이고, 가난과의 투쟁을 솔직히 말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을 만났다. 김나연의 『가난의 명세서』이다.

"빈자의 소비란 설레지 않는 선택이다. 세상에는 머릿속에 떠올렸을 때 가슴이 뛰지 않는 물건을 잔뜩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삶도 있다."(31쪽)

오키나와 여행을 가면서 고프로를 대여할 때 가장 저렴한 업체인 4만 5000원보다 "배송비를 포함해 5만 1000원에 카메라를 대여해주는 곳을" 골라야 하는 삶이 있다. 뭐든 할부로 결제해야 하고 "당장 다음 달에 4만 원을 내는 것보다 1만 원씩 5개월간 할부를 갚아나가는 편이" 경제적 심리적으로 부담이 덜 되는 삶이란 어떤 걸까. 이 소비는 5만 원과 4만 원 사이의 선택이 아닌 4만 원과 1만 원 사이의 선택이다. 다음 달까지 시간을 벌어야 하는 저소득 혹은 무소득자의 삶을 엿보는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그런데 미안하게 정말로 미안하게도(그러나 이 원고를 선택한 편집자에게 절로 박수가 나올 정도로) 이 책 너무 재밌다.

전 연인을 술회하는 대목에 이르면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세상의 벽 앞에 주저앉은, 상처 입은 한 사람을 만난다. 경제적 격차가 너무 커서, 아비투스의 그림자가 너무 짙어서, 그런데도 어떤 것이 탁월하고 아름다운지 구별할 안목이 내게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그 세계로 들어갈 출입증이 필요했다고 진술하는 김나연. 이처럼 결별한 대상을 향한 자기연민으로 맺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지만, 어쩌면 적지 않은 연인들이 겪어야 했던 유사한 상황에 대한 정밀한 묘사가 마음을 흔든다. "내가 정말 선망했던 것, 능력이나 업적이 아니라 노력으로 성취할 수 없는 어떤 것. 이를테면 가정환경이나 유복한 유년기, 그가 편리하게 향유하는 지성이나 문화 같은 것…… 나는 그런 것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고 쉽게 무너졌다." (107쪽)

가난 속에 있는 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으며 비윤리적이고 환경파괴를 일삼는 소비자일 수밖에 없다는 말은 불편한 진실이다. "윤리도, 도덕도, 아름다움도, 정치적 올바름도,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자본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는 자질처럼 느껴졌다." (137쪽) 결국 저자는 옷을 사지 않고 소비를 하지 않음으로써 대항한다.

영화평론가 백정우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채광이 좋은 10층 투룸 아파트로 이사했다고 밝힌다. 가난할 때는 궁핍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어서, 풍족해지니 잃을 날이 곧 올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고 토로한다. 그래서 가난이 무서운 것이고 아무리 부정하고 혐오하고 타자화하고 대상화해도 "가난은 뗐다 붙였다 하는 스티커가 아니라 문신처럼 세포 깊숙한 곳까지 스며드는 성질의 무언가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 아니 모르고 싶었다." 라고 썼나 보다.

그럴 수만 있다면 김나연의 다음 책은 가난과 결핍을 추억의 책장에 봉인해버린 커리어우먼의 위풍당당한 이야기였으면 한다. 참 모진 세상을 견디느라 애썼다는 얘기조차 사치스러워서 어른의 한 사람으로 미안하다. 그보다 먼저 이 책이 30쇄쯤 찍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