램프·와이어하네스로 읽는 지역 기업 생존 전략
전동화와 자율주행으로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이 급변하는 가운데 대구경북 자동차부품기업들의 미래 경쟁력이 연구개발(R&D)에 달렸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전통 내연기관 부품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전장·소프트웨어·자율주행 대응 기술로 무게중심을 옮기지 못하면 생존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램프 기술을 고도화하며 전장 영역을 확장 중인 에스엘과 와이어하네스를 기반으로 전기·자율주행 핵심 부품을 키우고 있는 티에이치엔의 R&D 전략은 지역 자동차부품 산업이 향하는 방향을 보여준다.
◆자율주행 시대로 향하는 에스엘
대구 대표 자동차부품 기업인 에스엘은 1986년 2월 자동차 부품업체 중 최초로 기술연구소를 설립할 정도로 신제품 개발에 앞서가고 있다. 지금도 1천400여 명의 연구인력을 보유하며 신기술 도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최근 에스엘의 연구개발(R&D) 기조는 전장과 광학, 소프트웨어(SW), 전동화를 축으로 하고 있다. 조직 구성과 연구개발비 집행 구조, 최근 연구 실적을 종합하면 램프 기술을 중심으로 한 고해상도·지능형·자율주행 대응 개발에 무게가 실린 모습이다.
에스엘은 전장설계부터 미래융합설계까지 폭넓은 연구개발 조직을 구축하고 있다. 전장설계통합센터 아래에 전장설계와 전자설계, 광학설계를 함께 배치하며 전장을 하나의 설계 체계로 운영하고 있다. 광학 설계와 해석, 성능 평가 조직이 연계돼 있고 미래융합설계센터에는 SW와 전동화 설계 조직이 별도 축으로 구성돼 있다. 연구개발 초기 단계부터 품질과 원가, 특허, 법규 인증을 함께 고려하는 조직 편제도 특징이다.
연구개발비는 최근 3년 동안 일정 수준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9월 누적 기준 연구개발비 총액은 1천667억7천만원으로 2024년 연간 연구개발비 2천170억원에는 못 미치지만 2023년 연간 연구개발비 1천713억9천만원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지난해 4분기 결산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연구개발비 지출 기조 자체는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매출 대비 연구개발비 비율은 소폭 하락했다. 2023년 6.45%였던 연구개발비 비율이 2024년에는 8.09%까지 높아졌으나 지난해 3분기 기준으로는 7.73%를 기록했다. 연구개발비 절대 규모는 유지하면서도 매출 증가에 따라 비중이 다소 낮아진 흐름으로 읽힌다.
연구개발 실적에서는 그 방향성이 더욱 뚜렷해진다. 연구개발 실적을 종합하면 에스엘의 R&D는 램프의 고해상도화·지능화·커뮤니케이션화로 압축된다. 연구개발 과제 가운데 가장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분야는 픽셀 매트릭스 기반 램프 기술이다. 이는 램프를 단순 광원에서 정밀 제어 가능한 고해상도 디스플레이로 확장하려는 흐름으로 읽힌다.
연구 과제 전반에 자율주행과 연계된 기능성 램프가 다수 포함돼 있다. 조명이 도로를 비추는 역할을 넘어 차량 상태·주행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용자 및 외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전제로 한 연구도 눈에 띈다. 이는 램프를 차량과 사람, 차량과 외부 환경을 연결하는 인터페이스로 활용하려는 방향이다. UV 살균, 투명, 프리폼 등 기존 자동차 램프와 다른 형태의 광원을 적용한 개발 과제도 포함돼 있다.
글로벌 자동차 산업이 전동화, 자율주행, 커넥티비티 등 첨단기술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는 가운데 에스엘은 램프 기술을 기반으로 전장 사업 영역을 지속적으로 확장해 왔다. 2009년 현대자동차 에쿠스 리무진에 국내 최초로 LED 헤드램프를 공급한 이후, 지능형 전조등 시스템(IFLS)과 보행자 보호용 후진 가이드(Back Up Guide) 램프 등 신기술을 양산 차량에 적용했다.
최근에는 어라운드 뷰 모니터링 시스템(AVM)과 전방표시장치(HUD), 능동형 공기유입 제어장치(AAF), 차량용 무선충전기 등으로 제품군을 넓혔고, 전기차 배터리 관리 시스템(BMS)과 차체 제어 모듈(SBCM)을 수주하며 전동화·전자 분야 매출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1조 클럽 눈앞 티에이치엔
신산업 전환 대응에 성공해 '1조 클럽' 입성을 눈앞에 둔 자동차 전장부품 전문기업 티에이치엔의 연구개발 활동도 눈에 띈다. 회사는 차량 내부의 전력·신호를 전달하며 신경망 역할을 하는 '와이어하네스'를 주력으로 한다. 전기차를 포함한 모빌리티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관련 제품에 대한 수요도 급증하고 있다.
티에이치엔의 지난해 3분기 누적 매출은 6천999억원으로, 이미 2024년 연간 매출액인 6천510억원을 넘어섰다. 무역의 날 행사에서는 수출 실적 5억달러를 기록하며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회사 측은 기존 공급망을 더욱 공고히 해 안정적인 성장 기조를 이어가는 한편, 전동화와 자율주행 등 모빌리티 기술 확산과 산업 구조 변화에 대응해 새로운 성장 동력 확보에 힘을 쏟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티에이치엔의 연구개발 활동은 완성차 및 글로벌 부품사와의 협업을 기반으로 한 현장 연계형 연구조직이 특징이다. 회사에 따르면 티에이치엔은 현대자동차 부품기술연구소에 직원 60명을 파견해 와이어 하네스 설계 업무에 참여하고 있다. 완성차 연구소와 직접 연계된 파견형 연구개발 조직을 운영하고 있는 셈이다.
차량 내부 전기를 분배하고 제어하는 '정션 블록'(Junction Block) 개발과 관련해서는 일본 후루카와 전기공업사와 기술 제휴를 맺고 연구개발을 선행연구팀에서 담당하고 있다. 해외 부품사와의 기술 협력을 통해 핵심 전장 부품 개발을 추진하는 구조다. 설계 역량 강화를 위해서는 프랑스 다쏘시스템의 3차원 설계 플랫폼 카티아(CATIA)를 도입해 부품설계팀에서 운영 중이다. 이를 통해 정션 블록 등 전장 부품의 독자적 설계를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티에이치엔의 연구개발비는 최근 수년간 확대 흐름을 보이고 있다. 2023년 133억원이었던 연구개발비는 2024년 159억원으로 약 20% 증가했다. 이 기간 연구개발비를 매출과 비교한 비율 역시 2.28%에서 2.45%로 늘었다. 지난해 3분기 연구개발비는 120억원을 기록하고 있다. 연간 기준이 아닌 3분기 누적임에도 일정 수준의 투자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연구개발비 가운데 인건비 비중이 가장 컸다. 연구개발 인력 확대와 함께 인적 자원 중심의 연구개발 투자 구조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티에이치엔의 연구개발은 전기차와 자율주행차에 필요한 전기 공급과 제어, 충전 장치를 차례로 개발해 온 과정으로 요약된다. 초기에는 전원 안정성에 집중했고, 이후 차량 통신과 충전 기술로 영역을 넓혔으며 최근에는 목적기반차량(PBV)용 전기 제어 장치까지 다루고 있다.
한국자동차연구원 대경분원의 성광모 차량주행실증플랫폼연구센터장은 "자율주행 연구개발은 그동안 미리 정해진 규칙을 차량에 적용하는 룰 기반으로 진행돼 왔지만 최근에는 AI 기반으로 기조가 옮겨가고 있다"며 "지역 자동차부품 업계 역시 이제는 AX 전환과 AX 제조에 힘을 실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부 R&D 방향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그 흐름에 맞춰 연구개발 방향과 전략을 설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