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칼럼-김수용] 4천470조 유동성의 역설, 돈은 왜 흐르지 않나

입력 2025-12-30 0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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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용 논설실장
김수용 논설실장

한국 경제가 기이(奇異)한 정체(停滯) 상태에 빠졌다. 시중에 풀린 돈은 사상 최대인데, 경제 맥박은 느려지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10월 기준 광의통화량(M2)은 4천470조원을 넘어 최고치를 경신했다. 그러나 돈이 얼마나 활발히 도는지를 보여주는 통화유통속도는 2014년 0.78에서 지난해 0.61까지 떨어졌다. 돈은 많지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돈맥경화'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M2 증가분을 들여다보면 실체가 드러난다. 10월 한 달 가계 및 비영리단체의 M2 잔액은 24조원 넘게 늘었다. 기업 부문 역시 예금과 단기금융상품 중심으로 자금이 쌓이고 있다. 이미 지난해 말 기준 국내 비금융기업의 현금성 자산은 1천100조원을 넘어섰다. 투자와 고용으로 흘러가야 할 자금이 금고와 대기성 계좌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경제 주체들의 선택은 분명하다. 소비도, 설비 투자도 미룬 채 '현금 보유'를 최우선 전략으로 택했다. 한국 시장이 더 이상 수익을 창출하는 공간이 아니라 리스크를 피해 숨을 고르는 대피소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상 최대의 유동성은 풍요의 증거가 아니라 갈 곳 잃은 자본의 집단적 침묵이다.

문제의 근원은 무너진 심리이고, 그 기저(基底)에는 정책 불확실성이 있다. 정부는 경기 부양을 명목으로 천문학적 재정을 투입하며 유동성을 공급해 왔다. 그러나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단기적 현금 살포식 처방은 소비 심리를 살리기는커녕, 가계로 하여금 미래의 세금 부담에 대비한 '방어적 저축'만 강화하는 역설을 낳았다. 28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25년 경제주체별 화폐 사용 현황 종합 조사'에 따르면 개인과 기업의 현금 보유액이 늘었다. 기업의 현금 보유가 늘어난 배경으로는 '경영 환경 불확실성 확대에 따라 비상시 대비 유동자산을 늘리기 위해'(36.3%)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정부가 시장에 신뢰를 주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뼈아픈 수치다. 글로벌 통상 질서가 재편되는 전환기에 우리 경제는 구조적 선택을 요구받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 대응은 규제 개혁이나 산업 경쟁력 강화보다 단기 재정 투입에 머물러 있다. 돈이 돌지 않는 이유는 유동성 부족 때문이 아니라 돈을 썼을 때 돌아올 보상과 안정적 규칙에 대한 신뢰가 사라져서다.

시중 자금이 고인 물로 변하면서, 코로나 팬데믹 직후 주식시장에서 나타났던 폭발적인 거래량은 보이지 않는다. 사상 최고 수준의 유동성에도 불구하고, 자금은 위험을 감수하는 투자보다 안전자산과 대기성 계좌에 머물고 있다. 문제는 이런 유동성이 언제든 생산적 투자 대신 부동산 등 비생산적 자산으로 쏠릴 수 있다는 점이다. 환율과 금리, 재정 정책의 부담 요인으로 지적돼 온 부동산 시장이 다시 들썩일 경우, 정책의 선택지는 더욱 좁아진다.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돈이 아니다. 돈이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이다. 정책의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회복하고, 기업이 미래의 수익을 계산할 수 있도록 제도적 신뢰를 복원해야 한다. 정부는 '돈을 푸는 주체'가 아니라 '돈이 흐르도록 만드는 조력자(助力者)'로 역할을 전환해야 한다. 정치 일정에 흔들리는 단기 처방을 멈추고, 인공지능(AI)·반도체 등 미래 산업으로 자금이 흘러가도록 규제 혁신과 세제 개편에 나설 때다.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 정책은 어떤 유동성으로도 경제를 움직일 수 없다. 금고 속에 머물러 있는 수천조원의 자금은 시장의 침묵이자 경고다. 침묵은 결국 정책 성적표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