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감성이 끌고 이성으로 지탱하기

입력 2025-12-24 16:5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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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에쿠니 가오리 지음/ 소담출판사 펴냄

영화평론가 백정우

에쿠니 가오리라는 이름을 떠올릴 때 먼저 생각나는 건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이다. 영화를 서너 번 보았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아오이 캐릭터로 인해 작가는 내게 외면당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딱히 나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좋지도 않은 애매모호 한 것들. 에쿠니 가오리는 내게 그런 작가였다. 사랑엔 젬병이고 결혼은 관심도 없는 비혼주의자일 거, 라고 추측했던. 그런 그녀가 결혼이라니.

에쿠니 가오리의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는 작가와 자신의 남편, 즉 결혼 3년 차 부부의 삶이 스냅사진 찍듯이 빼곡하게 박힌 흥미로운 산문집이다. 책은 일본 특유의 소소한 일상과 별거 아닌 것에 힘주어 의미를 부여하고 진력을 다해 고수하려는 고집스런 감성 가득한 풍경들로 펄떡거린다.

무색무취의 건조하기 짝이 없는 남자와 한집에 사는 세상 예민하고 감성적인 여자가 포착한 시시콜콜한 것들을 한곳에 모으면 이런 모습일까. 예컨대 집 옆 자판기에 놓인 품목으로 계절의 변화를 읽고 캔 수프가 놓이면 겨울이 시작될 무렵인 걸 알아차려야 안심한다든지, 결혼기념일마다 엄마가 보내온 꽃다발에는 늘 축하한다가 아니라 '놀랍다'는 말이 쓰여 있는데, 모두가 1년을 넘기기 힘들 거라 예상한 결혼생활이 유지되는 건 전적으로 남편의 관용 덕이라고 진술하는 대목은 과연 에쿠니스럽다.

"올바름이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결혼하고서 딱 한 가지 배운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올바름에 집착하면 결혼생활 따위 유지할 수 없다."(132쪽) 는 문장은 시사적이고 곱씹을 만하다. 작가의 남편은 제 손으로 물을 마시지 않고, 구운 생선은 뼈를 발라 주지 않으면 먹지 않고, 포도도 껍질을 까서 씨까지 발라내줘야 먹는단다. 요즘 세상에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할지 모르나 에쿠니는 이렇게 잇는다. "그래서 행복할 수 있다면 아주 손쉬운 일이다. 서로를 행복하게 해 주는 편이 서로를 길들이는 것보다 훨씬 멋진 일이니까."(133쪽)

'외간여자' 꼭지에서 작가는 남편과 같은 전철을 탄 여자, 같은 회사에 다니는 여자(아마도 예쁜), 다른 회사에 다니는 여자를 외간여자라고 칭하면서, 결혼할 때 남편에게 약속받은 일이 한 가지 있는데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외간여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밝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 역시 남편의 외간여자였고, 남편이 가끔 초콜릿을 사오는 건 "나를 외간여자에서 자기 여자로 만든 남편이 사과하는 뜻으로 건네는 선물"이라고 생각한다는 대목에서 웃음이 터졌다.

영화평론가 백정우

결혼 초기, 나 말고 다른 여자하고도 잘 지내, 하고 말했던 작가는 "다른 여자를 보면 절대 안 돼."라고 말하게 되었다면서 3년이 걸려서야 겨우 배웠다고 실토한다. 억지가 통하면 정당한 일은 안 통한다든가. 그래서 그녀는 책 말미에 이렇게 적었는지도 모르겠다. "남자든 여자든 사랑이란 몸을 보호해야 이루어지는 것. 언젠가 쿄겐에서 들었던 구절. 평온하고 사랑에 가득한 결혼생활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억지를 관철해야 한다."(135쪽)

30년 전에 발표한 『낙하하는 저녁』에서 동거 2년 만에 집에서 나간 켄고를 사수하기 위해 그가 좋아하는 여자 하나코를 받아들이고, 이사를 가버리면 켄고와 정말로 헤어지는 거, 라고 적은 에쿠니 가오리였다. 결혼은 좋은 쪽이든 그 반대이든 사람을 변하게 하는 거,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