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수 칼럼] 소통과 호통, 한없이 가벼운 대통령의 언행

입력 2025-12-21 10:18:49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2004년 3월 11일 오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청와대 브리핑룸에서 대선자금 수사와 측근 및 친인척 비리 관련 기자회견을 했다. 자신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안 의결을 몇 시간 앞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노 전 대통령으로서는 나름 측근 및 친인척 비리 문제에 대한 사과를 통해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

노 전 대통령은 최도술·안희정 등 측근들의 대선자금 관련 비리와 친형 건평 씨의 인사청탁 비리를 조목조목 설명하면서 사과했고 그 과정에서 인사청탁의 당사자로 남상국 전 대우건설사장의 실명을 두 번이나 공개했다.

"경기고·서울대를 나오시고 대우건설 사장까지 하신 분들이 돈 가방을 싸들고 상고를 졸업한 시골의 별 볼일 없는 사람(형)에게 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돈 주는 그런 일이 이제는 없어져야 합니다. 패가망신합니다."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의 입에서 범죄 혐의가 확정되지도 않은 인사청탁 사실이 상세하게 공개되자 남 전 사장은 기자회견이 끝나자마자 한강에서 투신한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IMF사태 후 그룹 해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대우건설 경영 정상화에 수완을 보인 그였지만 연임에 실패한 그는 비자금 조성과 인사청탁 여부에 대한 수사를 받다가 노 전 대통령의 공개 발언을 접하게 되자 극도의 수치심과 두려움에 휩싸여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셈이다.

탄핵소추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노림수로 기획된 기자회견은 결과적으로 성공했겠지만 극도로 정제돼야 할 대통령의 발언이 한 사람의 삶을 비극으로 이끈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각 부처에 대한 분야별 업무보고를 생중계하고 있는 이재명 대통령의 깃털보다도 가벼운 언행은 노 전 대통령의 기억을 떠올렸다. 지난 11일부터 시작된 각 부처와 산하기관에 대한 생중계 국정 업무 보고는 '환단고기'와 '책갈피 달러 밀반출' 검색을 둘러싼 인천공항공사 사장과의 입씨름만 각인되면서 부작용이 우려되고 있다.

인천공항공사 이학재 사장에게 "말이 기십니다. 어디서 노세요. 나보다 더 모르네"라고 지적하면서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는 이 대통령의 발언은 노 전 대통령보다 더 위험해 보였다. 이 사장이 다음 날 SNS로 조목조목 사실관계를 밝히면서 반박하는 모습에 안도감을 느꼈던 것은 다시 예기치 못한 비극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 같아서였다. 이 대통령의 발언은 공직자의 소신을 위축시킬 뿐만 아니라 정치적 반대자 낙인찍기로 공직자의 인격을 파괴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폭력이라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소통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공직자에 대한 일방적 호통은 '대통령은 다 알고 있다'는 만기친람(萬機親覽)식 독불장군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여러 논란과 우려에 대해 "정책 과정이 투명하게 검증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집단지성이 모여야 정책에 대한 신뢰도가 커진다"며 "연습하다 보면 다 좋아진다"며 생중계 방식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문제는 이 대통령의 깨알 지시와 준비되지 않은 질의가 즉흥적인 정책 변화나 조율되지 않은 정책 혼선으로 흐를 우려가 높다는 점이다. 더더구나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고 상처를 주고 무시해도 괜찮은 공직자는 세상에 없다. 대통령도 그럴 수 있는 권한은 없다. 이 대통령의 만기친람은 역대 대통령 모두 비판을 받은 바 있는 국정 운영 행태다. 국정 보고는 대통령이 잘 모르는 궁금한 사항을 즉석에서 묻는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 대통령은 '환단고기'가 위서(僞書)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역사논쟁을 제기한 것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재외국민과 동포의 개념도 잘 모른 채 정부가 (중국)조선족과 재외동포 등 소재국적별로 차별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질의한 것인가도 묻고 싶다. 핵을 가진 북한이 우리의 북침이 두려워서 방벽을 세우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북침을 언급한 대통령이다. 핵원료 재처리 여부 등 원전에 대해서는 당(黨)에 따라 입장이 다르다며 진영에 따른 편가름을 공식화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니라 민주당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을 자인한 것은 아닌지, 대통령 답지 않은 언행이 국정 발목을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