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전쟁 발발 6개월째인 12월, 인천상륙작전 여세를 몰아 유엔군과 국군이 압록강과 두만강 코앞까지 진격하자 중공군의 대대적인 인해전술이 시작됐습니다. 전세가 급변하자 12월 9일, 맥아더 유엔사령관은 전선을 사수하던 전 병력에 흥남 해상으로 철수를 명령했습니다.
영하 30℃ 혹한 속에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 등 동북부 전선(함경남북도 일원) 10만 병력이 속속 흥남항에 집결했습니다. 북한 피란민도 국군을 따라 흥남부두로 밀려들었습니다. 피란 행렬도 10만을 헤아릴 만큼 줄을 이었습니다.
4km 앞까지 접근한 중공군의 포성 속에 12월 15일, 흥남철수 작전이 시작돼 미 군함과 화물선이 병력과 군장비를 싣고 속속 항구를 탈출했습니다. 우리 정부와 군 지휘부의 간절한 호소에 피란민 구출작전도 함께 시작됐습니다.
흥남철수 8일째인 22일, 해상에 정박 중이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가 흥남항으로 들어왔습니다. 멀리 선창가에는 여전히 발을 구르는 피란민들로 아우성이었습니다. 놀란 광경에 라루(Leonard P. LaRue) 선장이 쌍안경을 들었습니다.
세간살이를 머리에 이거나 두 손에 잔뜩 들고 아이까지 업은 사람들. 병아리처럼 오들오들 떠는 아이들. 허리까지 차오른 바닷물로 걸어와 태워달라 애원하는 사람들…. 삶과 죽음이 멀지 않은 처참한 광경이었습니다.
"배에 실린 물자를 모두 내리고 저 사람들을 태우시오!" 선장의 명령에 선원들은 그물망을 내려 사람들이 올라오게 했습니다. 이따금 터지는 포탄 속에 악착같이 그물을 기어오르는 광경은 생존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습니다.
선원들은 피란민을 화물칸 맨 아래 지하 5층부터 4층, 3층으로 올라오며 갑판까지 빼곡히 태웠습니다. 22일 밤 9시부터 시작된 승선은 이튿날 낮까지 계속됐습니다. 더는 탈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어디선가 또 틈이 생겼습니다. 훗날 라루 선장은 "얼마나 많이 태웠던지 7천6백톤짜리 강철 화물선이 마치 고무줄처럼 늘어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이렇게 피란민 1만4천명을 태우고 23일 오후 흥남항을 출항했습니다. 기뢰가 쫙 깔린 바다를 탐지 장비도 없이 나섰습니다. 화물선 밑창에는 버리지 못한 300톤의 제트유가 실렸지만, 이를 모르는 피란민들이 추위에 불을 피우는 바람에 배가 통째 화장터가 될 뻔한 아찔한 순간도 겪었습니다.
흥남항을 떠나 온 지 28시간 만인 24일 늦은 오후, 우여곡절 끝에 다다른 부산은 이미 도처에서 몰려든 피란민들로 포화 상태. 뱃머리를 돌려 다시 7시간이 넘는 항해 끝에 25일 마침내 거제 장승포에 닻을 내렸습니다.
물, 음식, 화질실도 형편없는 데다 의료진, 통역관도 없는 최악의 피란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한 명의 사상자도 없는 완벽한 항해였습니다. 오히려 이틀간의 항해 동안 배 안에서는 새 생명이 다섯이나 태어났습니다. 가슴 졸였던 선원들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며 두 손 모아 기뻐했습니다.
그로부터 56년이 흐른 2006년 2월 26일, 메러디스 빅토리호 1등 항해사로 당시 피란민 구출 작전에 참여했던 로버트 러니(Robert Lunney·79)씨가 한국 방문길에 대구 대명성당을 찾았습니다. 그때 필자도 설레는 마음으로 달려갔습니다.
"생생히 기억나요. 그날 한 젊은 여성이 양손에 아이 손을 잡고 아기까지 업은 채 배에 올랐지요. 그때 등에 업힌 10개월짜리 아이가 강 신부님이었어요…." 전쟁 후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해 온 러니 씨는 반세기를 훌쩍 넘겨 다시 만난 강순건(56) 신부와 그날의 감격을 나눴습니다.
"그땐 구할 수 있는 모든 인원을 태우기로 했지요. 이 사진들은 우리 선원들이 직접 찍은 거예요." 러니 씨는 56년 전 그날을 기록한 사진을 담은 CD를 필자에게 건내며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피란민 구출작전의 영웅은 승무원들이 아니라 모두 하나가 돼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이겨낸 한국인 자신들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