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단견(短見)

입력 2025-12-11 10:3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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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강우 시인

심강우 시인
심강우 시인

축(逐). 바둑에 나오는 용어다. 상대의 돌을 잡기 위해 1선까지 계속 단수 치며 몰아가는 행태를 일컫는 말이다. 바둑에서 돌 하나를 잡기 위해서는 사면을 포위해야 한다. 갇힌 돌의 활로를 봉쇄하기 위한 자와 활로를 뚫기 위해 진력하는 자와의 각축에서 나오는 게 축이다. 바둑의 행마와 전술을 아는 이라면 '축도 모르고 바둑을 둔다'라는 말에 의당 모욕감을 느낄 법도 하다.

누구든 축에 걸릴 수 있다. 놀랍게도 그것은 비수로 작용하기도, 방벽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축, 그 외마디 속에는 생사를 앞둔 자의 숨가쁜 결기가 온축돼있다. 쫒기는 자의 앞길을 축머리라고 하는데 거세게 저항하며 달아나는 상대를 몰기 전에 저 멀리 암호 같은 투구를 확인하고 거기에 이르는 행로를 헤아려 본다. 그가 아군이라면 상대가 천하의 명마를 탔다 한들 살아날 길은 없다. 축에 걸린 것이다. 반대로 쫒기는 자의 경우 된통 걸려든 형세라고 생각했는데 축머리가 닿는 곳에 제 편 장수가 떡 버티고 있다면 이야말로 기사회생일뿐더러 역전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이토록 중요한 축의 형세를 간과해 대마가 몰사하는 경우가 있다. 눈앞의 정세에 골몰하다 먼 데를 놓쳤기 때문이다. 하수는 말할 것도 없고 고수도 그런 실수를 범한다. 이처럼 축의 묘미는 예상치 못한 반전에 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처지가 순식간에 뒤바뀔 수 있다는 것.

무슨 일을 도모하건 당장의 형세에만 급급해서는 곤란하다. 축머리는 기본이고 그것의 행로 끝에 무엇이 있는 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학업도 그러할 것이며 연애나 사업은 물론 국가의 근간인 삼권(三權) 운용도 마찬가지일 터. 정치는 더더욱 그러하다. 지금껏 축머리를 잘 운용하는 정치인을 본 적이 거의 없다. 축머리의 방향성과 유불리를 무시하고 무작정 공격하거나 맞받아치다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혹 오목으로 착각하고 두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오목은 바둑에 비해 행마가 단순하다. 깊은 궁리보다는 순간의 기지와 속전속결의 착수가 제격이다. 오목의 판세는 일목요연하다. 한눈에 판별되는 형세는 얕은 생각과 가벼운 행마를 부추긴다.

축머리가 생(生)으로 귀결될지 사(死)로 결판날지는 전적으로 돌을 쥔 자에게 달렸다. 그리고 그것은 안목의 길고 짧음이 관건이다. 반상(盤上)의 정황은 절대적이지 않다. 바둑을 아는 이라면 엎치락뒤치락이란 말의 속뜻을 이해하고 있을 터이다. 아울러 사소취대(捨小取大),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가진다는 말의 무게도 잘 알 것이다. 반상이 어지럽거나 뒤집히거나 뭐 그리 문제냐고? 지금까지 이 나라를 반상으로 생각하고 한 말이라면 대답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