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떠난 국보] 총탄 맞은 '비의 돌' 경상감영 측우대, 100여 년 유랑 끝에 고향을 묻다

입력 2026-01-08 1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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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46㎝·구멍 깊이 4.3㎝…1770년 측우대, 1909년 대구를 떠났다
친일파 박중양의 '선물'이 된 국보…대구→인천→서울, 측우대의 이동사
"왕도 정치의 표상"…1770년 경상감영 측우대가 말하는 통치의 기술

현재 서울의 국립기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의 모습. 조선 영조 시대인 1770년에 제작돼 일제강점기에 인천과 서울로 옮겨졌다. 지난 2020년 국보로 지정됐다. 국립기상박물관 제공
현재 서울의 국립기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의 모습. 조선 영조 시대인 1770년에 제작돼 일제강점기에 인천과 서울로 옮겨졌다. 지난 2020년 국보로 지정됐다. 국립기상박물관 제공

현재 서울의 국립기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330호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1770년 영조 시대에 제작돼 선화당 앞뜰에서 조선의 농정을 책임지던 이 화강암 석물은 일제강점기 친일 관료의 뇌물로 전락해 고향을 떠났다. 한국전쟁의 총탄 자국까지 온몸에 새긴 채 지금은 서울 국립기상박물관에 있다. 경주 황남대총 금관과 김천 갈항사지 석탑 등도 모두 서울에 있다.

주간매일은 대구경북 지역에서 출토·제작됐으나 타지에 흩어진 국보급 문화재의 현주소를 추적했다. 측우대는 단순한 기상 관측 도구가 아니라 백성을 위한 '왕도 정치의 표상'이었고, 신라 금관은 천년 고도 경주의 정체성 그 자체다. 이 유물들이 제자리를 떠난 배경에는 일제의 약탈과 중앙집권적 문화재 관리 정책이 자리하고 있다.

문화유산의 가치는 장소성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완성된다. 환수냐 공유냐의 이분법을 넘어, 장기 대여·순회 전시·공동 소장 등 유연한 방안을 모색해야 할 때다. 집 떠난 국보들이 다시 고향 땅을 밟고, 지역민이 자신의 역사와 마주할 수 있는 그날을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편집자 주〉

서울 종로구 송월동, 경희궁 옆 국립기상박물관에 들어서면 전시장 한쪽에 묵직한 화강암 석물 하나가 서 있다. 높이 46㎝, 가로세로 각 37㎝의 투박하지만 단단한 직육면체 돌. 무심히 지나치는 관람객들은 이 돌이 겪은 풍상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돌의 표면은 거칠었다. 곳곳에 파인 흔적은 한국전쟁 당시 빗발치던 총탄이 남긴 상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게 음각된 세 글자가 있다. 전면에 굵고 힘차게 새겨진 '측우대(測雨臺)'. 왼쪽 귀퉁이에는 작은 글씨로 '건륭 경인년 5월에 만듦(乾隆庚寅五月造)'이라는 제작 연대가 있다.

그때는 1770년(영조 46년)이었다. 조선의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내며 백성의 배고픔을 걱정했던 이 돌의 고향은 원래 서울이 아니다.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宣化堂) 앞뜰이 측우대가 있던 자리다.

돌기둥 윗면을 보면 둥근 구멍 하나가 뚜렷하다. 그 홈에 측우기(測雨器)를 놓았다. 깊이 4.3㎝, 너비 16㎝로 조선왕조실록에 명시된 규격이다. 15세기 세종 때 마련된 측우기 제도가 18세기까지 정확히 이어졌음을 입증하는 실물이다.

경상감영 측우대는 현존하는 측우대 5점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됐다. 조선은 1441년(세종 23년) 최초의 측우기를 만들었으나, 임진왜란 등을 거치며 전국 기상 체계는 무너졌다. 200여 년 만인 영조 시대에 다시 측우기·측우대를 전국에 보급했고, 이때 제작된 것이 바로 경상감영 측우대다.

◆ 선화당 뜰에서 석빙고 옆으로…쫓겨난 국보

시계 바늘을 100여 년 전으로 돌려보자. 1900년대 초반 대구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 야욕이 한반도를 집어삼키던 시절이었다. 상징이었던 읍성은 처참하게 허물어졌다.

1906년, 대구 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로 부임한 친일파 박중양은 일본 거류민들의 편의와 상권을 위해 성벽을 무너뜨렸다. 영조 때 쌓아 올렸던 성돌은 헐값에 팔려나갔고, 위엄 있던 선화당과 징청각은 일본 관리들의 숙소나 사무실로 전락했다.

그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선화당 앞뜰을 지키던 측우대도 제자리를 잃었다. 일본인들이 관아를 점거하면서 측우대는 석빙고 근처 어딘가로, 혹은 서문로의 임시 거처로 천덕꾸러기처럼 밀려나 있었다.

선화당 앞마당은 감영 권력의 중심이었다. 영남 전체의 농사와 세금, 흉년을 좌우한 강우 기록은 모두 이 자리에서 시작됐다. 관리들은 측우기를 확인했고, 비의 양은 대상(臺上)에 적혀 상부로 보고됐다. 측우대는 단순히 '비를 재는 장치'만이 아니라, 대구가 한반도 남부 행정의 중심 도시였음을 드러내는 증거다.

인천관측소 앞마당에 대구 경상감영 측우기와 측우대가 놓인 모습의 사진이다. 1930년대 일본인 다카하시 노보루가 촬영했다. 출처는 농촌진흥청의
인천관측소 앞마당에 대구 경상감영 측우기와 측우대가 놓인 모습의 사진이다. 1930년대 일본인 다카하시 노보루가 촬영했다. 출처는 농촌진흥청의 '1930년대 우리나라 농업‧농촌사진집'

◆ 관찰사의 뇌물이 된 문화재…인천 거쳐 서울로

운명의 1909년 4월이 찾아왔다. 이토 히로부미의 뒤를 이어 통감 자리를 노리던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 부통감이 대구와 경주를 순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박중양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소네 일행을 위한 환영식을 준비했다. 그 순시 행렬에는 일본 기상학자였던 와다 유지(和田雄治)가 동행했다.

와다 유지는 조선의 고대 기상 관측 기록에 남다른 집착을 보이던 인물이었다. 박중양은 그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조선 과학의 정수였던 측우대를 와다 유지에게 전달했다. 문화유산이 개인의 영달을 위한 뇌물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와다 유지는 훗날 자신의 저서 '조선고대관측기록조사보고(1917)'에 이렇게 적었다. "경상북도 관찰사 박중양 군이 나에게 선사한 것으로, 원래 대구 선화당 정원에 있던 것이다. 지금은 인천의 관측소 정원 내에 있다."

그렇게 대구의 유물은 와다 유지를 따라 인천으로 떠났다. 인천측후소 정원에 놓인 측우기 본체(구리 통)는 더 기구한 운명을 맞았다. 와다 유지는 공주 충청감영의 금영측우기를 일본으로 반출했는데, 대구의 측우기 역시 그 무렵 사라졌거나 보호 차원에서 실내로 옮겨졌다가 행방이 묘연한 것으로 추정된다.

광복이 찾아왔지만, 측우대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인천에서 서울 국립기상대(현 기상청)로 옮겨졌고, 한국전쟁의 참화를 온몸으로 겪어냈다. 총탄이 화강암에 씻을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돌의 표면 곳곳에는 날카로운 파편에 뜯겨 나간 듯한 흉터가 깊게 패었다. 이는 식민지와 전쟁 등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역사적 생존자'임을 보여준다.

◆ 측우대는 '왕도 정치의 표상'

조선에서 비를 재던 과학기구, 측우기·측우대는 단순한 강우량 측정 장비가 아니었다. 작은 눈금 하나로 전국의 농정과 조세를 합리적으로 운영하려던 조선의 통치 전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유물이다.

정조는 '분촌의 눈금으로 온 강토를 헤아린다'라는 문구를 남겼다. 그 지역에 가지 않더라도 측우기의 눈금만 보면 전국의 농정 상태를 헤아릴 수 있었다.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안민'의 명분 아래 농정의 합리화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국왕의 중앙집권적 통치력을 강화하는 데 필수적 도구였던 셈이다.

이러한 조선 기상 제도의 한복판에 경상감영 측우대가 있다. 김재영 국립기상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경상감영 측우대가 1770년이라는 명확한 연도를 지닌 실물로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치가 크다"고 강조했다. 조선의 측우기·측우대는 실록에 발명·배포 기록이 상세히 남아 있지만, 실제 유물은 전란과 소실로 남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다.

측우대는 백성을 위한 농정 제도이자, 국왕이 지방을 통치하는 행정 장치였다. 김 학예사는 이를 "왕도 정치의 표상"이라고 설명했다. 영조가 세종대의 제도를 실록에서 다시 확인하고 "놓치고 있었던 제도"를 복구하려 했다는 점, 정조가 측우기·측우대를 전국 단위 행정 체계의 핵심 수단으로 인식했다는 점은 '합리적 통치'라는 정치 철학과 맞닿아 있다.

현재 대구 경상감영공원 선화당 앞에 복원해 놓은 측우대와 측우기의 모습. 측우대는 경상감영 측우대를 본떴고, 측우기는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를 모양을 복원했다. 사진 서광호 기자
현재 대구 경상감영공원 선화당 앞에 복원해 놓은 측우대와 측우기의 모습. 측우대는 경상감영 측우대를 본떴고, 측우기는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를 모양을 복원했다. 사진 서광호 기자

◆ '장소의 문제'를 넘어 "연구·교육·전시 등 가치 전달이 핵심"

2026년 오늘, 대구 경상감영은 공원으로 복원돼 시민들의 쉼터가 됐다. 징청각과 선화당도 옛 모습을 찾았다. 그러나 그 공간에는 하늘을 읽었던 측우대는 없다. 현재 선화당 앞에는 경상감영 측우대와 충청감영 측우기를 '이상하게' 조합한 복제품만 있을 뿐이다. 측우대는 서울 국립기상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김재영 학예연구사는 문화재 이전을 둘러싼 논쟁을 보다 큰 관점에서 바라봤다. 장소가 바뀌는 것보다, 그곳에서 관람객이 얼마만큼 유물을 이해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결국 유물의 가치는 그 자체의 존재뿐만 아니라 연구와 해석, 교육, 전시라는 맥락 속에서 완성된다는 설명이다.

그렇기에 문화재 환수 논의를 '장소의 문제'로 한정하기보다, 유물이 지식을 생산하고 공유하는 체계 속에서 기능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소장 기관의 존재 이유가 단순 전시 공간을 넘어 연구·보존·교육의 중심축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유물의 존재 뒤에는 방대한 강우 기록, 관측 체계, 재난 기록이 함께 쌓여 있다. 김재영 학예연구사는 "유물만 보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며 "유물이 측정한 데이터를 연구자들이 실제로 활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박물관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대구시는 2033년까지 경상감영 원형 복원 사업을 추진 중이다. 아직 측우대의 복원이나 환수 움직임은 없다. 국가 소유인 국보는 장기 대여, 공동 소장, 선화당 마당 원위치 전시 등 다양한 방식을 고려해볼 수 있다.

대구시 문화유산과 관계자는 "현재 추진 중인 경상감영 복원 사업과 연계해, 국보인 측우대의 복원이나 환수 등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시민들이 이 소중한 유산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창덕궁 연경당 측우대의 모습. 국내 현존하는 측우대는 모두 5점이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와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등 2점이 국보이고, 관상감 측우대와 통영 측우대 등 2점은 보물로 지정됐다. 창덕궁 연경당 측우대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5점 중 제작연도가 확인된 경우는 모두 3점이고, 그 가운데 1770년에 제작된 경상감영 측우대가 가장 오래됐다. 국가유산청 제공
창덕궁 연경당 측우대의 모습. 국내 현존하는 측우대는 모두 5점이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와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등 2점이 국보이고, 관상감 측우대와 통영 측우대 등 2점은 보물로 지정됐다. 창덕궁 연경당 측우대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5점 중 제작연도가 확인된 경우는 모두 3점이고, 그 가운데 1770년에 제작된 경상감영 측우대가 가장 오래됐다. 국가유산청 제공
통영 측우대의 모습. 국내 현존하는 측우대는 모두 5점이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와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등 2점이 국보이고, 관상감 측우대와 통영 측우대 등 2점은 보물로 지정됐다. 창덕궁 연경당 측우대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5점 중 제작연도가 확인된 경우는 모두 3점이고, 그 가운데 1770년에 제작된 경상감영 측우대가 가장 오래됐다. 국가유산청 제공
통영 측우대의 모습. 국내 현존하는 측우대는 모두 5점이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와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등 2점이 국보이고, 관상감 측우대와 통영 측우대 등 2점은 보물로 지정됐다. 창덕궁 연경당 측우대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5점 중 제작연도가 확인된 경우는 모두 3점이고, 그 가운데 1770년에 제작된 경상감영 측우대가 가장 오래됐다. 국가유산청 제공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의 모습. 국내 현존하는 측우대는 모두 5점이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와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등 2점이 국보이고, 관상감 측우대와 통영 측우대 등 2점은 보물로 지정됐다. 창덕궁 연경당 측우대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5점 중 제작연도가 확인된 경우는 모두 3점이고, 그 가운데 1770년에 제작된 경상감영 측우대가 가장 오래됐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의 모습. 국내 현존하는 측우대는 모두 5점이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와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등 2점이 국보이고, 관상감 측우대와 통영 측우대 등 2점은 보물로 지정됐다. 창덕궁 연경당 측우대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5점 중 제작연도가 확인된 경우는 모두 3점이고, 그 가운데 1770년에 제작된 경상감영 측우대가 가장 오래됐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관상감 측우대의 모습. 국내 현존하는 측우대는 모두 5점이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와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등 2점이 국보이고, 관상감 측우대와 통영 측우대 등 2점은 보물로 지정됐다. 창덕궁 연경당 측우대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5점 중 제작연도가 확인된 경우는 모두 3점이고, 그 가운데 1770년에 제작된 경상감영 측우대가 가장 오래됐다. 국가유산청 제공
관상감 측우대의 모습. 국내 현존하는 측우대는 모두 5점이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와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등 2점이 국보이고, 관상감 측우대와 통영 측우대 등 2점은 보물로 지정됐다. 창덕궁 연경당 측우대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5점 중 제작연도가 확인된 경우는 모두 3점이고, 그 가운데 1770년에 제작된 경상감영 측우대가 가장 오래됐다. 국가유산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