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진 뒤 너른 들판/ 하늘엔 기러기 몇 점/ 처마 밑/ 알록달록한 거미에게/ 먼 지방에 간 사
람의 안부를 묻다'
장석주 시인의 '12월'을 읽는다. 연말이다. 이맘 때면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분주하면서도 쓸쓸하다. 매듭이나 마무리 짓지 못한 건 없는가, 무심코 누군가를 마음 아프게 한 적은 없었나, 힘든 사람을 짐짓 모른 척하진 않았는지, 옷깃을 여미며 아침 찬 바람에 잎 떨어지고 말라가는 나무들을 본다. 또 이 맘때면 늘 관세음보살을 외며 정안수(井華水) 떠 놓고 기도하던 어머니 생각이 난다. 그리고 먼 곳, 스쳐 지나온 도시의 그 짧고 쓸쓸했던 밤도 떠올린다.
몇 년 전 이 맘때 들렀던 할슈타트의 하룻밤, 혼자 떠난 먼 길이었다. 당시 나는 무능하고 무도한 자들이 저지르는 협잡을 번히 눈 뜨고 지켜만 봐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었던지라 국내에 하루도 더 있고 싶지 않았고, 그때 택한 여행지가 유년의 동화 배경이 되는 곳이었다. 동화 속 하이디가 뛰어다녔을 법한 알프스 산기슭 평원에 앉아 멍하니 설산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고 흰 빵을 배낭에 차곡차곡 쟁여 다니기도 했다. 가끔 백조로 변한 오빠들을 안타깝게 지켜보는 엘리제, 긴 머리를 탑 아래 늘어뜨린 라푼젤, 겨울왕국의 엘사 그리고 사운드 오브 뮤직의 줄리 앤드류스까지 떠올리며 독일 변방과 오스트리아를 떠돌아 다녔다.
물론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기는 자신의 무능을 감추기 위해 거짓으로 협잡을 일삼는 무도한 자들, 불의함을 알면서도 짐짓 침묵과 방관으로 일관하는 비열하기 짝이 없는 카르텔이 여전히 눈에 띄지만 어찌하랴, 그들 또한 이 아름다운 행성 지구에서 그저 함께 숨 쉬며 살아갈 수밖에… 아아, 그나마 나는 지인들에게 초긍정 마인드의 소유자라 불리지 않는가. 그렇게 혼자 떠난 먼 길 위에서 지구가 품은 아름다운 풍경을 만났음을 오히려 그들에게 감사한다.
여행은 늘 최상의 깨달음을 준다. 요즘 매일 밤 듣는 '반야심경'식으로 여행을 추앙한다. 아뇩다 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최상의 깨달음)!
◆날마다 축제, 할슈타트
오스트리아엔 바다가 없다. 대신 동쪽에 알프스에서 녹아내린 빙하가 만든 호수 마을이 계곡 굽이마다 수없이 흩어져 있다. 그 76개 잘츠캄머구트(Salzkammergut, 합스부르크왕가 소금 공급처)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는 곳이 할슈타트다. 빈을 떠나 잘츠부르크에서 할 슈타트까지 버스로 넘어오면서 신의 손길로 빚은 듯한 호수들을 만났다. 유리창 밖으로 숲에 둘러싸인 호수를 보며 푸른 면경(面鏡) 같다는 싯귀를 떠올리다가 불현듯 떠나온 곳이 그리워 푸른 참소주 술병 같단 생각에 혼자 풉, 웃기도 했다.
숲속과 초원의 외딴집들 나무지붕 위로 새들이 날아올랐다. 손거울 같은 작은 호수들과 큰 거울 같은 고사우 호수, 트라운 호수를 지나 할슈타트 호수 앞에 닿았을 때 동행자들은 모두 낮게 탄성을 내뱉었다. 수면 위 한가로이 노니는 백조들이 번잡한 세사는 잊으라는 듯 구구거리며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마치 크리스머스 선물을 잔뜩 받은 알프스 소녀처럼 나는 들뜨기 시작했다.
햇빛 아래 금비늘처럼 반짝이는 호수를 앞에 둔 인구 천여 명의 도시 할슈타트는 크리스마스 카드에 그려진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다. 날마다 축제를 열 것만 같은 곳, 호숫가 집들 창마다 빨간 제라늄, 포인세티아 화분을 내놓아 더욱 그렇다. 곳곳이 중근세 건물들이고 개인보트 선착시설이 딸린 집들도 드물지 않다. 할슈타트의 모든 집들은 각기 다른 특색들을 지녔는데 건축 연구 핑계라도 대고 그냥 이곳에 눌러앉아 살고 싶을 정도로 예쁘다. 걷고 멈추는 곳마다 뷰 포인트라 어느 곳에서 사진을 찍어도 작품이다.
할슈타트 교구 성당의 후기 고딕양식의 날개 달린 제단화를 보고 오란 지인의 말을 떠올려 그 곳으로 갔다. 1181년 세워졌다는 성당 뜰 앞의 마을 묘지가 잘 가꾼 정원 같다. 1505년 현재의 고딕양식으로 바꿔 17세기 초부터 지하를 납골당으로 사용했다는데 그곳엔 약 1천200개의 두개골이 쌓여 있다. 마을의 부족한 매장 공간 탓에 사후 20년 동안만 묘지에 안치했다가 납골당으로 옮겨 둔 것이라고도 하고, 일설로는 유럽 페스트 대역병기 유골도 있다고도 한다.
장미꽃이나 기사단 문양을 그려 넣은 유골들도 전시되어 관람객들에게 묘한 울림을 준다.
중심부 마르크트 광장은 수많은 인파로 북적이는데 요즘은 아예 할슈타트를 그대로 모방한 도시를 지었다는 중국인들이 대다수라고 한다. 광장 옆 할슈타트 박물관의 '시간 여행'을 각국어로 쓴 계단이 유명하다는데 난 내부 관람에 홀려 보질 못했다. 전시품은 역시 소금도시답게 고대 소금 채굴 도구, 청동기시대 생활용품, 무기, 장신구 등이었다. 오스트리아 전통의상 던들(dirndl)을 입은 벽안(碧眼)의 금발 소녀와 청년, 노인들이 인상적이었다.
◆메리 크리스머스, 할슈타트
할슈타트(Hallstatt)의 '할(Hall)'은 고대 켈트어로 소금을 뜻한다. 마을을 뜻하는 '슈타트
(Statt)'가 합쳐져 이름이 되었다. 이곳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채굴 흔적이 있어 세계 최초 타이틀을 가진 소금광산이 있다.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의 소금평원, 남미 안데스산맥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 잘츠부르크 소금광산, 이스라엘 사해의 소금호수, 티벳고원의 소금산과 호수, 이렇게 여행을 다니다 보면 천일염을 비롯한 자염, 전오염(물소금), 암염, 호수염, 도화염, 정제염 등 소금이 인류사와 가장 밀접하단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렇듯 인류에게 필수 불가결한 소금은 동서고금 그 생산지와 인근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할슈타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잘츠캄머구트 지역 알프스 산맥은 한때 바다였고 시간이 흐르면서 거대한 암염 광맥으로 형성되었다. 천여 년 전 홍수로 호수 바닥 아래 물에 잠긴 도시가 있다는 전설이 있는 할슈타트 소금광산은 현재 채굴은 하지 않고 체험 공간으로 조성되어 시 재정에 엄청난 도움을 주고 있다.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가 10여 분 더 걸어 올라가는 소금광산 투어는 광부복을 착용하고 들어가야 한다. 지하 800m까지 내려가면서 중간중간 미끄럼틀을 타는 재미도 솔솔찮고 체험을 겸한 역사 공부도 되니 가족 관광객들이 이렇게 많은가보다. 미끄럼 공간은 시속 30km까지 나온다는데 체중이 많이 나가는 사람은 위험해 보일 정도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을 정도로 뛰어난 경관과 긴 역사를 지닌 할슈타트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초기 배경,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 영화 '존 윅'의 스핀오프(파생작) '발레리나' 만화가 강풀 작가 원작 드라마 '마녀' 등의 배경지이기도 하다. 며칠 전 영화 발레리나를 보며 액션 장면보다 어, 저기 내가 걸었던 골목이네, 어, 그때 현빈 닮은 멋진 청년이 나오던 그 집 대문이네, 혼자 좋아라 몰입했던 게 생각난다. 아무래도 올 연말 할슈타트행은 어려울 것 같으니, 충남 논산의 강경산 소금문학관 소금 크리스머스 트리나 보러 갈까.
박미영(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