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미술사 연구자
조선 19대 왕 숙종의 넷째 아들 연잉군의 21세 때 모습인 '연잉군 초상'은 생전에 화가가 왕자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린 초상화로 유일하게 남아있다. 오른쪽 4분의 1 정도가 완전히 훼손됐다. 1954년 12월 불에 타서 이렇게 됐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에서 부산으로 주요 문화유산을 피난시켰는데 용두산 일대의 대화재로 왕의 초상화, 어진이 피해를 입었다. 원래 창덕궁 선원전에 모셔져있던 48점 중 30점이 전소됐다.
'연잉군 초상'은 군(君)에 봉해진 왕자의 18세기 초상화가 공신상과 같은 형식이었음을 알려준다. 오사모를 쓰고, 녹색 단령을 입었으며, 무소뿔로 만든 서대를 두르고, 검은 가죽신을 신었다. 호랑이 가죽이 깔린 교의에 양손을 앞으로 모으고 앉아 상판에 화문석을 올린 족좌대에 발을 얹은 교의좌상(交倚坐像)이다.
안면 부분은 왼쪽 얼굴과 귀를 보여주는 좌안7분면이고 족좌대도 같은 시점이어서 생김새가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반면 몸체는 거의 정면상이다. 신분에 따른 표현양식일 것 같다. 눈, 코, 입 주변에 미세하게 명암을 표현해 이목구비의 사실감과 입체감을 살렸다.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초상화의 관례를 따르면서도 침착하고 사려 깊은 분위기를 풍긴다. 숙종의 하명에 따라 화원 박동보가 그렸다.
흉배의 문양은 문신의 학, 무신의 호랑이와 달리 상상의 신령한 동물인 백택(白澤)이다. 덕이 있는 임금의 치세에 나타난다고 한다. '연잉군 초상'은 백택, 구름, 파도 등을 금으로 그렸는데 단령의 비단 바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옷에 바로 금실로 자수를 놓았던 것인지, 같은 재질의 비단에 수를 놓아 부착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경국대전'에 왕비 소생인 대군은 기린 흉배, 후궁이 낳은 군은 백택 흉배였으나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다. 왕의 아들은 적장자인 왕세자, 적자인 대군, 서자인 군으로 나뉜다. 용 문양의 용보(龍補)는 왕 이외에 왕비, 왕대비, 왕세자, 왕세자빈, 왕세손, 왕세손빈 등만 발톱의 갯수를 달리해 사용할 수 있었다.
화면 왼쪽에 '처음에 연잉군에 봉해졌고 호는 양성헌이다(初封延礽君古號養性軒)'라고 적혀 있다. 원래의 표제가 불타 없어져 버리자 관리를 위해 누군가가 적어 넣은 듯하다. 양성헌은 숙종이 연잉군에게 집을 사주면서 하사한 집 이름으로 타고난 착한 본성을 잘 기르라는 뜻이다. '맹자'에 나온다.
연잉군은 후사가 없던 경종의 후계자인 왕세제로 책봉됐다가 1724년 제21대 왕으로 즉위한다. 바로 영조다. 이 초상화를 그릴 때는 10년 후 자신이 왕위에 오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초상화는 그 사람을 영원히 살게 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그래서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 모셔두는 일은 국가의 중대사였다. 영조는 즉위 이전과 이후의 초상이 모두 남아 있는 유일한 왕이다.
대구의 미술사 연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