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문예광장] (수필) 청산에 살으리랏다/ 김아가다

입력 2025-12-16 10:4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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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가다 수필가
김아가다 수필가 '청산에 살으리랏다' 관련 이미지.

〈청산에 살으리랏다〉

구룡산 정상은 청도와 경산, 영천이 연결되는 꼭짓점이다. 나는 구룡 정상리에서 산속 생활의 재미에 푹 빠졌다.

교통사고를 겪고 생과 사의 극점에서 해방되니 나는 누구인가? 존재 의미를 찾고 싶었다. 이제까지 살아온 시간은 내가 없었다. 자랄 때는 집안의 맏이라서 욕심 부릴 수 없었고, 아내와 엄마 역할은 자신을 돌볼 시간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사회생활도 마찬가지였다. 타인을 향한 배려와 양보의 삶이 미덕인 줄 알았으니. 할 만큼 하지 않았을까, 나를 격려하고 싶어서 배낭을 꾸렸다.

머무는 곳에 이름 하나 지었다. 마니또 산방.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은둔의 삶을 즐기고 싶어서다. 그런데 은둔하려는 만큼 불편한 것을 고수해야 한다. 고지가 높고 노인들만 사는 곳이어서 인터넷이 되지 않는다. TV는 케이블을 연결하면 시청할 수 있지만, 그마저도 거부했다. FM '세상의 모든 음악'은 유일하게 좋아하는 채널인데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CD와 USB로 음악을 즐길 수밖에 없다. 창을 열고 등받이 의자에 몸을 푹 파묻는다. 산 아래 산을 내려다보는 희열을 맛보고 있으니, 세상 부러운 것이 없다.

햇볕 따갑던 계절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얼굴에 닿는다. 그 상큼함이란, 오감 만족이다. 칠월 염천에 산방으로 올라왔는데 어느새 가을을 맞았다.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에 다람쥐 발걸음 바퀴처럼 구르고, 잦은 장마에 산기슭 언덕배기 뉘 집 어르신 유택이 허물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연은 변화무쌍하다.

솔 냄새 짙은 오솔길 지나니 색색의 단풍이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만추의 계절, 가을이 익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산책길, 밤나무 밑에 탐스러운 밤톨이 알밤알밤 하면서 내게 손짓한다. 한 개 두 개 줍다 보니 양손에 가득하다. 욕심은 금물이다.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면서 뒤돌아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자연에서 배운다. 멧돼지도 먹고, 청설모도, 우리는 모두 자연이 아닌가.

겨울과 봄은 아직 살아보지 않아서 감이 잡히지 않지만, 기대에 부푼다. 어떤 풍경일지, 또 어떤 환경이 될지 설레기도 한다. 눈이 하얗게 내려 천지를 덮으면 갇힌 자유를 만끽하고, 봄이면 잠자던 생명이 수런거리며 깨어나는 소리를 들으리라. 그때쯤이면 내 몸도, 쑥국새 소리에 맞춰 화란춘성 만화방창을 노래할 수 있을까.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나로부터 연결된 모든 고리를 끊어야 했다. 제일 먼저 한 것이 전화기 차단이다. 처음에는 캄캄한 밤길을 혼자 걸어가는 기분이었는데 그것도 잠시, 생각하기에 달렸다. 혼돈 속에서 나름대로 질서가 생겼다. 해가 뜨면 일어나 산책하고, 배고프면 밥 먹고 어둠이 내려오면 하루를 감사하면서 잠자리에 든다. 지극히 평범한 자유를 누리는 기쁨은 영혼을 정화한다고 할까. 소확행이라는 신조어가 어느 별에서 왔는지 모르지만, 이 순간 숨이 멈추어도 아쉬울 것 없다는 생각이 든다.

파열된 세포와 근육이 제자리를 찾아가느라 통증이 심하다. 산방에서 도전한 것이 맨발 걷기다. 마사토 깔린 길을 디디면 바늘로 찌르는 고통이 따른다. 한 발짝 디딜 때마다 살아온 날들을 떠올린다. 굽이굽이 고해苦海의 빙산을 넘어왔는데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지, 입술을 깨문다. 세월이 약인 모양이다. 그러구러 시간이 흐르고 상처 난 자국이 굳은살 되어 단단해지고 있다. 대자연의 혜택을 누리면서 덕지덕지 때 묻은 영혼까지 세척했으니 감사하는 마음이 덤이다.

이참에 주소를 옮겨볼까, 생각 중이다. 산골짝 오지 마을에 버스가 들어오지 않는다. 사람이 몇 명 살고 있지 않기도 하지만 꼬불꼬불 낭떠러지를 올라오기에 난감해서다. 오지 주민에게 군에서 지원하는 100원 행복택시가 있다. 주민에게만 교통 티켓이 6개월분 40장이 지급된다. 거리는 제한적이지만, 읍내 시장이나 지역 내에 볼일이 있으면 100원 주고 택시를 이용한다. 주민이라고 해봤자 열 명도 되지 않지만, 행복택시와 오지 주민은 친근한 이웃이 될 수밖에 없다.

마을 사람들은 인심이 넉넉하다. 지나가는 길손에게도 막걸리 한 잔, 물 한 잔 나누며 반가이 맞이한다. 정에 목마르고 사람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는 마음이리라. 마을은 산새 좋고 공기가 맑아서 영혼이 아프거나 육신에 병든 사람이 찾아온다. 영혼의 상처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다독이고, 육신에 자리 잡은 복병은 산림에서 뿜어내는 피톤치드로 다스린다. 동네의 자랑거리는 구룡에 쉬었다 가는 사람들은 치유의 기쁨을 안고 하산한단다.

산중 음악회가 시작되려나. 선득한 골바람 타고 색소폰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질 듯 감질나게 들린다. 트리하우스에 사는 초보 박 선생의 연주다. 더듬이를 세워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조붓한 토깽이 길에 들어선다. 고욤나무에 앉은 까치가 노래를 부르면서 하늘로 비상한다. 하얀 셔츠에 검정 슈트. 연미복을 입은 까치의 자유가 부럽다.

질세라, 단전에서 들숨을 깊이 끌어올려 "나는 자유다!" 크게 뱉어낸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하지 않던가. 지난한 세월의 흔적은 창공에 던져야겠다. 나물 먹고 물 마시며 청산에 살으리랏다.

수필가 김아가다
수필가 김아가다

◆약력

- 대구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

- 매일시니어문학대상, 청송객주문학상외 다수

- 수필집 '희나리' '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