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심강우] 우리의 신발

입력 2025-11-20 13:51:58 수정 2025-11-20 13:59:56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심강우 시인

심강우 시인
심강우 시인

작가는 세인트팬크러스 역에서 파리행 열차 유로스타를 탔다. 열차가 바다 밑 터널 진입을 앞두고 애시포드 인터내셔널 역에 도착했을 때 70대 초반의 남자가 맞은편에 앉았다. 남자는 작가에게 자기는 지금 와이프가 호텔 방에 두고 온 신발을 찾으러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와이프가 말렸지만 굳이 간다는 말도 덧붙였다. (대체 무슨 신발이길래?)

켄트의 노스다운스에 있는 자기 집까지 우체국에서 그것을 제대로 배달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는다는 말까지, 남자의 말은 거침이 없었고 표정은 단호했다. (특별한 사연이 깃든 신발 혹은 물질적 가치를 뛰어넘는 그 무엇의 표상이려나?)

이윽고 대체 어떤 신발이냐고 작가가 물었다. (이렇게나 늦게 질문한다고?) 남자는 한쪽에 굽을 추가한 의료용 신발인데 와이프의 한쪽 다리가 다른 쪽보다 짧다고 했다. (이토록 위해 주는 걸 보니 다리는 짧지만 생각은 엄청 긴 여자겠지?) 작가는 그럼 부인이 파리에서 켄트로 돌아갈 땐 어떤 신발을 신고 갔냐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작가는 사생활 침해가 될까봐 그랬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나는, 아니 우린 침략 수준이게?)

작가가 묻기도 전에 남자는 "그 신발이 아니면 와이프가 집 안을 오가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했다. 바닥에 닿는 신발 특유의 소리 덕분에 아내의 동선을 파악할 수 있다고 부언했다. 와이프가 걱정이 돼서 그러는 거냐고 묻는 작가에게 남자는 와이프의 균형감각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다만 아내가 그 신발을 신지 않고 다니는 통에 자신이 "도무지 긴장을 풀지 못"한다고 답했다. (이 남자야말로 파놉티콘 운용의 적임자가 아닐까?) 급기야 작가는 남자의 와이프가 일부러 신발을 호텔에 두고 온 것일지도 몰라,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말이!)

위의 글은 데버라 리비의 생활자서전 3부작 중 둘째 권 '살림 비용'에 나오는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별난 사람의 별난 에피소드로 여겼던 이야기가 시간이 흘러 내가 몸담고 있는 현실과 접목되면서, 둘이 동색(同色)을 띠면서 전혀 별나지 않은 이야기로 변모했다.

끈끈하고 예민한 거미줄 같은 그것에 걸리면 좀체 벗어날 수 없다. 중요한 내용에서부터 단순한 안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걸 카톡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그것은 잰걸음으로 다가와 이쪽의 의중을 타진한다.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은밀한 신발이지 않을까?

신발의 발신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객기를 부리다 내상을 입는 사람도 적지 않다. 카멜레온처럼 위장한 스팸까지 더하면 세상은 톡톡거리며 끄는 '신발 소리'로 가득하다. 우린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의료용 아니, '의도용 신발'을 신고 있다. 의도가 지나쳐 "도무지 긴장을 풀지 못"하는 처지에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