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공개된 한·미 관세협상 팩트시트에 대해 여권은 "매우 잘 된 협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합의문을 차분히 읽다 보면 우려가 앞선다. 국제 합의의 구속력은 내수용 정치구호가 아니라 단어 하나, 문장의 구조 하나에서 결정된다. 이번 합의문은 그 점에서 한국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 적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다.
우선 가장 주목할 표현은 'commit'이다. 국제 통상 합의에서 commit은 '확정적 의무'를 말한다. 일단 양국이 공동으로 commit을 넣은 문장은 총 7개다. 한국 측 의무를 설명하는 부분에는 총 4개다. 그런데 미국 측 의무를 설명하는 부분에 commit이 포함된 문장은 0개다. 대통령실은 자화자찬하기 전에 최소한 이 구조적 비대칭부터 읽어야 한다.
심각한 문제는 공동 commit조차 실질적 부담은 한국이 지는 구조라는 점이다. 예컨대 "미국 기업이 한국에서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양국이 commit 한다"는 문장은 공동 commit으로 표현됐지만 실질적으로는 한국의 규제 완화 약속이다. 일본과의 삼국협력, 한국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대해서도 양국이 commit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실질적으로는 한국이 조치를 해야 하는 항목이다.
미국의 의무 표현은 더 문제다. Commit은커녕 미국의 관세 관련 조치는 'will apply' 'intend to apply' 'intend to remove' 등 구속력 없는 표현으로 합의돼 있다. 이런 문구는 미국이 필요하면 언제든 합의의 구속력을 부정할 수 있는 여지를 둔다. 정부는 "반도체 관세에서 대만과 동등한 대우를 얻어냈다"고 했지만 합의문에는 그저 미국이 그런 조건을 "제공할 의향이 있다"고만 돼 있다. 이는 법적 의무가 아니다. 이런 기본적인 해석을 놓치고 있다면 협상 자체보다 더 큰 문제다.
안보 분야는 보다 섬세하게 행간을 읽어야 한다. 핵추진 잠수함 건조 승인 자체는 의미 있지만 정작 건조 장소와 핵연료 조달 방식은 후속 협상에 남겨뒀다. 반면 미국산 무기 250억 달러 구매와 주한미군 지원비용 330억 달러를 부담하는 조항은 모두 한국의 확정적 의무다. 미국과의 안보 협력 강화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그 대가가 무엇인지 냉정히 따져보는 과정이 대통령실 설명에는 보이지 않는다.
국내에서 가장 덜 조명된 대목은 디지털 규제다. "미국 기업이 망사용료와 플랫폼 규제, 데이터 이전에 있어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한다"는 조항은 한국의 디지털 주권 전반을 사실상 통상 협정의 틀 안에 넣는 결과를 낳는다. 특히 구글 고정밀 지도 관련 위치 정보는 그간 국가안보를 이유로 국외 반출을 제한해온 사안이다. 이번 합의를 통해 정부가 스스로 그 기준을 뒤집은 셈인데 그 파장을 대통령실이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경쟁법 절차에서의 '변호사와 의뢰인의 비밀유지권(ACP)' 도입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공정거래위원회 조사에 불만을 제기해 온 미국 기업의 요구가 반영된 것이다. ACP가 한국 법제 전반에 정착된다면 제도적 성숙이라 평가할 수 있지만 준비 없이 부분적으로만 적용된다면 우리 국민이 누리지 못하는 방패를 국외 대기업에게만 쥐어주는 결과가 될 수 있다. 대통령실이 과연 이런 방식의 ACP 도입이 사법제도 전반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고 문안에 합의해준 것인지 의문이다.
쉽게 말해 이번 팩트시트는 한국의 복합적 의무는 확정하고 미국의 약속은 언제든 조정할 수 있도록 한 늑약(勒約)이다. 대통령실은 협상 결과를 장밋빛으로 포장하기 전에 문구 하나하나가 의미하는 바를 읽어내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팩트시트를 보고 대통령실이 무척 무능해 보이는 게 나의 오해이길 빈다. 김용범 정책실장이 말했듯 올해가 을사년이기 때문이다.
조상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정책보좌관 / 법률사무소 상현 대표변호사
* 가스인라이팅(Gas Enlighting)은 매일신문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칼럼 공간입니다. '가스라이팅'은 1930년대 가스등을 사용하던 시절 파생된 용어입니다. 가스등을 조금씩 어둡게 해 누군가를 통제하는 걸 의미하는데요 '가스인라이팅'은 그 반대로 등불을 더 밝게 비춰주자는 뜻입니다. 젊은이들의 시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자주 선보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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