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고향 의성]<15> 가을 의성 미완의 산수유

입력 2025-11-13 12:30:00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의성에 가을이 왔다.봄에는 노란색에서 여름에는 초록으로, 계절의 변화에 따라 이제 붉은 빛깔의 열매로 옷을 갈아 입었다.매일신문 DB
의성에 가을이 왔다.봄에는 노란색에서 여름에는 초록으로, 계절의 변화에 따라 이제 붉은 빛깔의 열매로 옷을 갈아 입었다.매일신문 DB

'3월 산불이

꽃보다 먼저 피었다.

노란 산수유의 약속은 재로 남았으나

붉디붉은 열매 어김없이 가을로 돌아왔다.

사랑도 그러하더라

제대로 피우지 못한 봄을 잊고

가을의 전설이 피어난다.

산수유마을에 가을이 왔다'

가을이 왔다.의성의 가을이다. 상실의 아픔을 안고 있는 고운사에선 다시 새벽예불을 알리는 스님의 독경소리가 가을바람을 타고 울려 퍼져 나와 사바세계 중생의 고뇌를 위로해주고 있었다. 쓸쓸하고 고독하거나 외로운 느낌의 가을이 아니라 수확과 겨울을 준비하는 위안의 가을이다. 축제가 끝난 후의 허전함보다는 올해도 이런 저런 힘든 일을 겪고서도 무사히 잘 지내왔다는 '시절' 안도감이 앞서는 그런 가을이 찾아왔다.

고운사 입구 가로숲 은행나무길.가을바람에 흔들리면서 노란 은행 단풍잎으로 터널을 이루면 손님을 맞고 있다.
고운사 입구 가로숲 은행나무길.가을바람에 흔들리면서 노란 은행 단풍잎으로 터널을 이루면 손님을 맞고 있다.

고운사 입구 가로숲 은행나무길은 '화마'의 습격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가을의 절정을 지나고 있다. 살랑살랑이는 가을바람에 흔들리면서 떨어지는 은행나무 잎들의 환영 인사를 받는 듯 했다. 이른 아침임에도 산책에 나선 인근 주민들과 도로에 떨어진 은행잎을 청소하는 어르신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고운사도 가을 들어 본격적인 복원작업을 시작, 불탄 가운루 등의 잿더미를 제거하는 공사차량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하루가 억겁(億劫) 같고 억겁이 하루와 같다'는 <화엄경>을 꺼내지 않더라도 고운사는 멀지 않아 우리 앞에 번듯한 옛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

◆산수유마을

매년 이른 봄이 시작되는 3월 열리는 '의성 산수유(⼭茱萸)마을 꽃맞이 축제'는 올해로 18회 째를 맞이했지만 축제 개막일인 3월 22일 사곡면과는 꽤나 떨어져있는 안평면 야산에서 발화된 산불이 심각해지자 축제를 주관한 의성군이 예정된 축제일정을 전면 취소하면서 미완의 축제로 남았다.

'산수유 축제'는 사실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전남 구례군 산동면 산수유마을 일대에서 열리는 산수유 꽃맞이 축제가 전국에서 가장 빨리 열리고 유명하다. 산수유는 잎보다 노란 꽃을 먼저 피워 봄이 왔음을 알리는 '봄의 전령사'라고도 불린다. 눈 속에서도 꽃이 핀다는 복수초와 매화가 피면 산수유가 구례와 의성, 경기도 이천에서 차례로 꽃망울을 터뜨린다. 대지는 매화와 산수유 꽃을 통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알리고 노란 산수유가 산골마을을 온통 뒤덮으면 뺨을 스치는 봄바람에서도 훈풍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산수유 꽃맞이 축제에 참가한 관광객들이 뚝길을 따라 걷고 있다.의성군 제공
산수유 꽃맞이 축제에 참가한 관광객들이 뚝길을 따라 걷고 있다.의성군 제공

매화와 산수유가 어우러진 화려한 구례와 달리 의성 산수유 꽃맞이축제는 산자락에 자리 잡은 사곡 산수유마을을 온통 수놓듯 노란 산수유꽃길이 띠를 잇는 가운데 파릇파릇한 줄기를 드러낸 의성을 대표하는 마늘밭의 초록이 조화를 이루는 특별한 봄 풍경에 탄성을 지르게 한다. 산수유꽃길을 따라 걷다가 눈앞에서 문득 만나게 되는 초록의 마늘이 보여주는 강인한 생명력에 감동하게 되는 것이다.

의성 산수유마을엔 한지(6쪽)마늘 주산지인 의성답게 가을이 깊어가면서 마늘을 파종(종구)한다. 잎보다 먼저 피는 성질급한 산수유 꽃처럼, 산수유는 가을이면 잎이 다 떨어져도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빨간 산수유 열매가 주는 기가 막힌 풍경을 선사한다. 산수유는 꽃이 피는 봄에만 아름다운 봄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는 셈이다.

산수유나무가 줄지어 선 인근 마늘밭에선 농부들이 손길이 바쁘다. 파종의 시간이다. 겨우내 추위를 견뎌낸 마늘이 파릇파릇해질 때인 내년 봄이면 다시 산수유는 노란 꽃으로 우리들을 유혹할 것이다. 이미 마늘을 파종한 들판에선 푸른 마늘 싹이 올라와 들판 전체가 은은한 초록으로 물들어있는 이색적인 가을풍경을 만난다.

가을 파종 마늘밭.
가을 파종 마늘밭.

온 산이 '가을색'으로 갈아입고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하는데 이른 봄처럼 파릇파릇한 초록의 어린 마늘싹을 보는 순간, 의성의 색다른 매력을 느끼게 된다. 마늘은 한겨울 영하의 추위를 견뎌내는 시간의 기적을 만들어내면서 땅 속에서 마늘을 키워낸다.

내년을 기다려야 하는 산수유 꽃맞이 축제는 보통 일주일 동안 열린다. 미완으로 남은 올해 산수유 꽃맞이의 아쉬움을 더해 내년에는 소박하지만 더 강렬한 산수유꽃향기를 자랑하게 될 것 같다. 산수유꽃은 축제 개막 때 피기 시작, 축제가 끝날 때쯤에서야 만개(滿開)한다는 사실을 메모해두는 것도 꽃맞이 관람 Tip이다.

산수유열매는 약용효과가 뛰어난 한방재료와 차로도 애용되고 있다. 그냥 베어물면 시고 떫은 맛이 강하지만 이는 오히려 수축력을 강화시켜주는 작용으로 이완되고 완화된 신체기능을 정상으로 조절하는 치료효과가 뛰어나다. 특히 신장기능이 허약한 사람들에게 좋다.

◆구봉산 문소루

구봉산에도 가을이 찾아왔다.의성읍성(邑城)을 방어하는 요새인 구봉산을 따라 남대천이 휘감아 흐르고 산자락이 의성읍내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의성읍으로 향하는 관문인 숭의문 옆의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곧바로 남대천 물길을 내려다보고 의성읍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문소루(聞韶樓)가 있다.

문소루.문소는 의성의 옛 명칭으로 문소루는 고려중엽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후 여러 차례 중건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문소루.문소는 의성의 옛 명칭으로 문소루는 고려중엽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후 여러 차례 중건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문소는 의성의 옛 명칭으로 문소루는 고려중엽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후 여러 차례 중건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안동 영호루와 더불어 영남 4대 누각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6.25 전쟁 때 불에 타 소실되었다가 1983년 군민들의 노력으로 새롭게 중건됐다.

누각에 오르면 의성읍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뷰 맛집'이다. 그래서 평소 읍내에서 가볍게 운동삼아 오를 수 있는 산(해발 211m)이라서 주민들의 산책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새벽 안개가 걷히는 시각, 문소루 누각에 오르면 남대천을 흐르는 물길에 아침햇살이 은빛으로 반짝이는 몽환적인 풍경을 만날 수도 있다.

구봉산 등산로는 숭의문 옆 요양병원 쪽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된다. 등산로는 문소루를 시작으로 남쪽으로 남대천을 따라 난 능선을 따라 용연재를 거쳐 구봉산 정상까지 이어진다. 문소루 주변을 시작으로 울긋불긋한 단풍이 구봉산을 온통 물들이고 있다.

비록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깊고 묵직한 시간이 품어내는 의성의 향기가 스며드는 가을을 만끽하고 싶었다. 조문국 고분도 이른 새벽이나 노을이 지는 저녁이면 억새와 황금빛으로 바뀐 고분이 빚어내는 시간여행으로 안내할 것이다. 경주 고분과는 다른 조문국 고분이 풍기는 고대왕국의 신비한 '미스터리'를 찾아나서는 역사기행같은 그런 가을이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 didero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