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이재명 대통령의 TV 예능 출연이 도마에 올랐다.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로 국가 전산망이 마비된 비상 상황에서 국정 최고 책임자의 오락 출연이 적절한지 찬반 논란이 뜨거웠다. 정치인은 왜 오락 프로에 진심일까? 고대 로마 황제 정치와 오락의 관계를 들춰본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스페인 계단
1953년 개봉된 영화 「로마의 휴일」. 명배우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헵번의 달달한 데이트 장면이 스크린, 아니 팬들의 가슴을 달궜다. 여러 명장면 가운데 헵번이 스페인 계단에서 젤라또를 먹는 장면은 언제 떠올려도 달콤하다. 스페인 계단은 교황청 주도로 1723–1725년 사이 완공한 후기 바로크 양식의 걸작이다.
136개 계단 꼭대기에는 프랑스 국립 성당, 아래는 천재 조각가 베르니니의 아버지가 설계한 바르차카 분수가 자리한다. 그 앞 스페인 광장에 스페인 대사관이 있어 스페인 계단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돈은 프랑스가 댔는데... 영화를 떠올리며 젤라또를 입에 물고 10분여 북쪽으로 걸어가면 포폴로 광장이 나온다.
◆포폴로 광장 이집트 투트모스 3세 오벨리스크
'포폴로(Popolo)'는 민중이라는 뜻이니 민중 광장이다. 고대 로마 제국 시절, 수도 로마에서 북쪽으로 출발하는 도로 플라미니아 가도(Via Flaminia)의 출발점이었다. 교황청 순례객들이 로마에 처음 들어오는 지점이어서 1475년 교황 식스투스 4세가 광장을 정비했고, 19세기 초 교황 피우스 7세 때 건축가 주세페 발라디에가 오늘날 보는 타원형 대칭 구조의 신고전주의 광장으로 재정비했다.
광장 한가운데 오벨리스크가 장엄하게 솟았다. 고대 이집트 신왕국 18왕조의 강력한 파라오 투트모스 3세(재위 B.C.1479–B.C.1425)가 오늘날 카이로 시가지 북동쪽 헬리오폴리스 태양신 라(아몬) 신전에 만든 오벨리스크다. 포폴로 광장으로 온 것은 1589년 교황 식스투스 5세 때다. 하지만, 처음 로마로 온 것은 이보다 훨씬 오래전 B.C.10년이다.
◆최대 오락 전차 경주장 오벨리스크- 제국 프로퍼갠더
포폴로 광장에서 발길을 로마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로 돌려보자. B.C. 5세기 처음 만들었고, 1세기 대리석으로 웅장하게 재건축한 전차 경주장이다. 관람객 수용 규모는 무려 25만명. 거대한 경주장 중앙 분리대(Spina)에 B.C.10년 오벨리스크를 세운 인물은 옥타비아누스다. 로마의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왜 이집트 오벨리스크를 가져왔을까?
B.C.30년 이집트를 정복해 지중해 팍스 로마나를 구현한 옥타비아누스는 제국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다. 장소는? 로마 시민들이 가장 열광하며 즐기던 오락, 전차경주 경기장. 수십만 시민이 전차 질주에 환호하며 경기장 한가운데 높이 솟은 이국적인 오벨리스크를 바라본다. 문명고도이자 경제부국 이집트를 정복한 제국의 위상이 한껏 고양된다. 오벨리스크는 제국 프로퍼갠더였다.
◆카메오 조각과 오벨리스크- 황제 프로퍼갠더
루브르 박물관의 B.C.1세기 옥타비아누스 카메오(cameo) 조각을 보자. 카메오는 층을 이루는 반투명 보석, 주로 줄무늬 마노(onyx), 줄무늬 석영(agate)의 층(層, layer)간 색 차이를 이용해 만든 부조(浮彫, relief)다. 로마 황실 구성원 조각에 주로 쓰였다. 색 대비 덕분에 고급스러운 입체감이 살아난다.
옥타비아누스 황제의 이상화된 아름다움과 권위를 잘 보여준다. 배경의 월계관은 황제의 승리를 나타내는 대유법이다. 이집트 정복, 안토니우스와의 내전 승리를 상징한다. 로마 최대 오락 프로그램인 전차 경주장 오벨리스크는 카메오 조각처럼 황제의 권위를 극대화시키며 제국의 번영을 일군 은인 이미지를 드높인다. 황제 프로퍼갠더였다.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 전차 경주장 히포드롬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0년 로마제국 수도로 삼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가보자. 남쪽 마르마라해, 동쪽 보스포러스 해협, 북쪽 골든 혼의 3면 바다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다. 중심은 술탄 아흐메드 광장이다. 성 소피아 성당과 블루 모스크를 비롯한 로마 이슬람 유적이 즐비하다.
술탄 아흐메드 광장은 정사각형, 원형인 서유럽 대도시 광장과 달리 기다란 타원형이다. 왜 그럴까? 그리스어권에서 '히포드롬'이라고 부르는 로마 전차 경주장 자리이기 때문이다.키르쿠스 막시무스는 로마 제국 전반기 수도 로마, 히포드롬은 로마 제국 후반기와 동로마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전차 경주장이다. 히포드롬 서쪽에 튀르키예 이슬람 예술박물관이 붙어 있다.
히포드롬 서쪽 관중석 일부 유적에 지붕을 씌운 현장(In Situ) 박물관이다. 박물관에 1600년 제작된 판화 그림이 맞아준다. 현재 술탄 아흐메드 광장의 썰렁한 느낌과 달리 전차 경주장의 모습이 엿보인다. 박물관에는 다양한 유물을 근거로 재현한 히포드롬 그림들을 전시중이다. 여기에 10만 명 수용 규모 전차 경주장의 압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난다.
◆이스탄불 히포드롬 투트모스 3세 오벨리스크
히포드롬을 묘사한 1600년 그림을 잘 보면 중앙 분리대(Spina)에 오벨리스크가 높이 솟았다. 이 오벨리스크 역시 로마 포폴로 광장 오벨리스크처럼 이집트 신왕국 18왕조 투트모스 3세 오벨리스크다. 원래 설치 장소는 이집트 역사고도 룩소르의 카르낙 아몬 대신전이다.
357년 콘스탄티우스 2세가 카르낙 아몬 대신전에 서 있던 1쌍의 투트모스 3세 오벨리스크를 지중해안 알렉산드리아로 옮기고, 그중 1개를 로마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세웠다. 로마 키르쿠스 막시무스에는 오벨리스크가 2개 있었던 거다. 이 오벨리스크는 지금 로마 라테라노 산조반니 광장에 서 있다. 알렉산드리아에 남아 있던 나머지 1개 오벨리스크를 39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 히포드롬 스피나에 세운 거다.
◆이스탄불 오벨리스크와 기단석- 황제 프로퍼갠더
이스탄불 히포드롬 오벨리스크는 다른 지역 오벨리스크와 달리 기단석이 유난히 크다. 다양한 조각으로 가득하다. 기단석 4면에 테오도시우스 황제와 두 아들(훗날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 황후, 황실 가족, 원로원 의원, 관리, 군인이 새겨져 있다.
전차 경주장 황제 전용석 '카티스마'에 있는 황제와 가족을 다른 등장인물보다 크게 조각하는 위계적 비례 기법을 써 황제의 위엄이 강조된다. 전차경주 장면은 물론,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장면이 세밀하게 조각돼 로마의 건축 공법까지 잘 보여준다.
다키아, 게르만 조공 사절 장면은 로마 제국과 황제의 위상을 한껏 높여 준다. 무엇보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서사시 양식인 헥사미터(Hexameter, 6음보 시) 형식의 라틴어 비문은 388년 반란군을 제압하고 제국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온 테오도시우스의 업적을 찬양한다. 조선시대 용비어천가다. 시각예술과 문학을 정치 프로퍼갠더로 활용한 전형적인 사례다.
◆빵과 오락으로 공화정치 망각
로마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시민 25만명, 콘스탄티노플 히포드롬에서 시민 10만 명이 열광하던 전차경주. 관람료는 없다. 국가가 돈을 대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도박을 걸며 즐기면 된다. 전차경주는 음악과 춤, 곡예가 펼쳐진 종합 엔터테인먼트였다. 전차 경주장 키르쿠스(Circus)가 영어 서커스가 된 이유다.
공화정을 독재정으로 바꾼 황제들은 시민이 즐길 오락을 제공하며 자신의 권위를 드높였다. 민주정치를 잃고 오락에 빠져든 로마 사회는 서서히 병들어갔다. 북아프리카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160년~220년)는 『De Spectaculis(공연에 대하여)』에서 전차경주가 영혼을 타락시킨다고 우려했다.
유베날리스(60년~130년)는 『Satires(풍자시집)』에서 "시민 전체가 전차팀에 돈과 감정 걸었다"며 전차경주의 정치 팬덤화와 도박 문화를 꼬집었다. 2천년 전 로마 황제의 오락 정치가 21세기 대한민국에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다가온다.
김문환 역사저널리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