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거나 읽히거나] 그들이 사는 세상

입력 2025-10-23 13:4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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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오카와 사야카 지음 / 갈라파고스 펴냄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에서 임청하는 트렁크에 마약을 숨겨 밀반출하는 브로커 역할로 나오는데 마약 운반에 이용할 인도인을 청킹맨션에서 접촉한다. 영화 속 청킹맨션은 구역마다 골목마다 모퉁이마다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인으로 득시글거린다.

일본의 문화인류학자 오가와 사야카가 쓴 '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는 홍콩 거주 탄자니아인의 이야기, 더 정확하게는 청킹맨션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삶의 파노라마를 사회경제학 관점에서 그린다. 책 표지에 적힌 카피('기존의 호혜, 증여, 분배 이론을 뒤흔드는 불확실성의 인류학')가 아니었다면 3류 추리소설 같은 제목에 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책은 홍콩과 중국에서 활동하는 아프리카인의 교역시스템을 연구하던 저자가 중문대학 교환교수로 홍콩에 도착한 2016년 10월 탄자니아인 공동체의 핵심인물 (스스로 청킹맨션의 보스라고 말하는) 카라마를 만나면서 시작한다. 사야카는 카라마를 취재하고 동행하고 교류하는 동안, 탄자니아인들의 일상과 정보통신과 전자화폐를 이용한 교역구조를 이해하고, 상호지원을 통한 안전망 구축에 열심인 조합의 당위성을 납득하며, 그들이 모국에서 벌이는 사업과 인생 설계에 대해 정밀하게 묘사한다. 청킹맨션의 보스 카라마가 저자에게 공동체를 보여주고 호의를 베풀며 받아들인 이유는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아이 여섯에 아내도 여섯 있고 하루에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는다는 등의 얘기를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화를 내는 거야. 아프리카인은 가난하니까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거지. 아프리카인이 아시아에서 즐기거나 큰돈을 갖고 있거나 평온하게 살아가면 수상쩍은 일을 하는 게 아니냐고 의심해."(253쪽)

안전과 미래가 담보되지 않는 경제활동은 무모하고 무지하다 인식하는 현실. 신용과 담보 없는 호의가 사라진 세상에서 카라마를 비롯한 탄자니아인들은 '겸사겸사' 논리와 ICT를 이용한 교역시스템으로 멤버 간 공헌의 불균형과 신뢰 문제를 돌파한다. 예컨대 브로커는 '교역인'(단기 비즈니스 목적으로 홍콩에 온 동포)의 선물 구매를 돕거나 문화 즐기는 법을 알려주고, 교역인은 모국의 최신 정보를 제공하거나 컨테이너와 캐리어의 남는 공간에 브로커가 가족과 친구에게 보내는 선물과 상품을 '겸사겸사' 운반해준다. 이런 호혜는 과도한 부담이 발생하지도 않고 친절에 즉시 응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요컨대 누군가에게 고용되거나 종속되지 않으며, 불확실성의 세계를 긍정하면서 삶을 여행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보스 카라마와 청킹맨션의 탄자니아인들인 것이다.

영화평론가 백정우
영화평론가 백정우

보편적 사고로 이해하기 어려운 생활방식과 비즈니스 관행이지만, 그들 나름의 규칙과 선을 지키면서 서로를 돕고 보호하기 운용되는 전 세계 네트워크와 상호 부조는 놀랍다. 동포에 대한 지원을 당연하게 여기며 언젠가 나도 같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그들의 믿음. 책의 마지막, 오가와 사야카는 말한다. "청킹맨션의 보스는 불완전한 인간과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타자나 사회에 제멋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게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이들 시스템은 세련되지 않고 적당하며 허술하기에 오히려 멋지다."(286쪽)

처음엔 독서용 음악으로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림(California Dreamin)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덮을 땐 토큰스가 부른 라이온 슬립스 투나잇(The Lion Sleeps Tonight)가 안성맞춤이었다. 낭만적이고 나른하면서 씩씩하게.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