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강우 시인
아이는 할머니를 따라 뒷산에 올랐다. 할머니의 손엔 조그만 자루가 들려 있다. 할머니는 땅에 떨어진 뭔가를 줍는다. 뭐냐고 묻는 아이에게 할머니는 벌쭉 웃으며 도토리 하나를 보여준다.
아이도 할머니를 따라 도토리를 줍는다. 하나둘 세며 줍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도토리를 건넬 때마다 할머니의 합죽한 입에 웃음이 번진다.
"우리 손주 눈처럼 똥실똥실하구나. 맛있는 도토리묵 만들어 주마." 할머니의 말에 아이는 내가 도토리묵을 먹은 적 있나? 고개를 갸웃거린다. 가까운 계곡에서 건너오는 물 소리가 숲속의 시간에 청량감을 더한다.
"할머니, 저기!" 아이의 목소리가 쨍하게 울린다. 할머니가 허리를 펴고 본다. 다람쥐 한 마리가 오도카니 서서 두 사람이 하는 양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 할머니가 자루에서 도토리 한 줌을 꺼내어 나무 밑에 놓는다.
아이의 눈이 동그래진다. "할머니, 아깝게 왜 그래?" "다람쥐도 겨울 나려면 먹을 게 있어야지." 그래도 다람쥐는 떠나지 않는다. 할머니가 또 한 줌 내놓는다.
"내가 주운 건데…." 아이가 샐쭉하며 다람쥐를 흘겨본다. "식구가 늘었다고 다람쥐가 말하는구나." "다람쥐도 식구가 있어?" "그럼! 다람쥐네도 엄마 아빠가 있고 아기도 있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있지." 아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우리 집은 할머니와 나뿐이니까…."
며칠 주운 도토리로 묵을 만든 할머니는 아이와 먹을 걸 따로 챙겨둔 뒤 다섯 모를 시장에 갖고 왔다. 호박 두 개와 오늘 아침 텃밭에서 거둔 부추도 묵 옆에 놓았다. 묵은 금세 팔렸다. 재료를 아끼지 않은 데다 마트보다 훨씬 싼 가격인지라 아낙네들은 반색을 하며 지갑을 열었다.
호박도 다 팔렸다. 문제는 부추다. 할머니는 욕심이 과했나 싶어 두 손을 비빈다. 초조할 때면 나오는 버릇이다. 부추 다섯 단이 모두 시원찮다. 병해를 입었는지 군데군데 짓무르고 누렇다. 찬바람에 몸을 떨면서도 할머니는 자리를 뜨지 못한다. 손주 겨울 외투 장만하려면 돈을 좀 더 모아야 한다.
부추 두 단을 선뜻 산 새댁이 몇 걸음 가다가 돌아온다. "마저 살게요. 할머니." "어휴 이 많은 걸 다 뭐하게." "부추겉절이도 하고 부추전 해서 모임에 가져 가려고요." 새댁이 생글거리며 말한다.
추위가 싹 가신 얼굴로 할머니는 "부추 상태가 안 좋아서……." 뒷말을 흐린다. 말하는 것마저 친정 엄마를 닮았다. "약을 안 쳤다는 뜻이잖아요." 새댁이 웃으며 장바구니에 부추를 담고 일어선다. '자, 10인분의 부추전에 맞는 모임을 어떻게 만들지?' 시장을 빠져나오며 새댁은 적합한 모임을 궁리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