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오의 대구경북의 집이야기] 달성 묘골의 오묘한 집, 삼가헌(三可軒)

입력 2025-10-12 13:35:05 수정 2025-10-12 17:5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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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 11대손 박성수가 초가 짓고 자신의 호를 그대로 가져다 '당호'로
후손 손길 거치며 지금의 위용 갖춰

삼가헌 고택의 별당 하엽정에 풍경이 흐른다. 천원지방의 사상을 품은 정원은 삼가헌이 지닌 아름다움의 정수다. 매일신문 DB
삼가헌 고택의 별당 하엽정에 풍경이 흐른다. 천원지방의 사상을 품은 정원은 삼가헌이 지닌 아름다움의 정수다. 매일신문 DB
달성 묘골의 삼가헌 고택에 가을볕이 내려 앉는다. 지(智), 인(仁), 용(勇)의 덕으로 세워진 이 집이 앞으로도 명맥을 잇기를 바란다.
달성 묘골의 삼가헌 고택에 가을볕이 내려 앉는다. 지(智), 인(仁), 용(勇)의 덕으로 세워진 이 집이 앞으로도 명맥을 잇기를 바란다.

◆지(智) · 인(仁)· 용(勇)의 덕으로 세워진 집

산길과 물길을 따라 마을이 들어선다. 그중에는 유래가 범상치 않은 마을이 있다. 달성 묘골 마을. 언젠가는 꼭 들러야 할 마을이다. 백일홍이 찬란히 필 무렵마다 하목정(霞鶩亭)에 머물렀다.하목정에서 묘골은 멀지 않다. 하목정의 여름 풍경에 마음이 이끌릴수록 묘골이 그리웠다. 아침을 깨우고 저녁을 불러들이는 바람엔 가을이 한창이다. 계절이 기울고 있다. 더는 미룰 이유가 없다.

이른 아침, 묘골의 고택 삼가헌(三可軒, 국가민속문화재 제104호)으로 향했다. 낙동강 물길에서 머지않은 고택이다. 낙동강 물길이 스치는 곳마다 마을의 터전이 다져지고, 그 위에서 선조들의 애환이 펼쳐졌다.

예로부터 낙동강은 대구·경북의 숱한 마을을 일으킨 젖줄이다. 이 강에 기대어 삶을 이은 선조들을 일일이 헤아리기 어렵다. 고대의 가야 또한 이 물길을 따라 흥했고 현풍과 논공, 하빈, 칠곡의 마을들 역시 낙동강에 기대어 오늘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삼가헌에 도착했지만 서둘러 대문채 안으로 들어서지 않았다. 대문채가 솟을대문이 아니라 평대문이라 소박하고 따뜻한 기운이 느껴진다. 대문채 곁에 심어진 붉은 꽃무릇과 탱자나무가 눈을 붙잡는다. 햇살을 받은 꽃무릇은 영글어 만개했고, 그 옆의 탱자나무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굽고 굽이진 가지마다 달린 노란 탱자는 마치 삼가헌의 오랜 역사를 밝히는 등불 같다.

삼가헌 대문채 앞, 붉은 꽃무릇과 탱자나무가 객지의 나그네를 반갑게 맞이한다.
삼가헌 대문채 앞, 붉은 꽃무릇과 탱자나무가 객지의 나그네를 반갑게 맞이한다.

삼가헌의 어른은 이 나무를 어떤 마음으로 심었을까. 더는 후손들이 패도 세력의 비정한 권력에 쓰러지지 않기를 바라는 뜻이 있었을까. 영욕의 순간이 닥치더라도 터만은 남기를 바란 어른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삼가헌'이라는 당호를 지은 어른은 취금헌 박팽년(醉琴軒 朴彭年, 1417~1456)의 11대 후손 박성수(朴聖洙, 1735~1810)다. 그는 1769년(영조 45년) 이곳에 초가를 짓고 자신의 호 '삼가헌'을 당호로 정한다. '삼가(三可)'는 선비의 세 가지 덕목 지(智), 인(仁), 용(勇)을 뜻한다. 지혜로움과 인자함, 그리고 용기가 이 집을 들어 올린 정신적 기둥이다.

삼가헌 고택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집을 떠받치는 정신적 기둥은 무엇인가를.

초가였던 삼가헌을 안채와 사랑채를 온전히 갖춘 양반가로 일으킨 인물은 박성수의 아들, 박광석(朴光錫, 1764~1845)이다. 그는 1809년에 안채를 짓고 1826년에 뒤이어 사랑채를 완성한다. 삼가헌은 처음부터 기와지붕의 위엄을 지닌 가옥으로 태어난 게 아니다. 집이란 시간의 결과 손길이 겹겹이 쌓여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아가는 법이다.

대문채 밖으로 주인어른이 나오신다. 후손 박도덕 주인장이시다. 조심스레 인사를 올리니, 주인장은 들어가 보라고 손짓한다. 허락을 얻어 삼가헌 안으로 발을 들인다. 마당은 넓고 단정하다. 사랑채 앞에는 키 큰 파초가 넓은 잎을 흔들며 나그네를 맞이한다. 사랑채 오른편에는 초가지붕의 문간채가, 그 너머는 내외 어른이 거처하는 안채로 이어진다.

너른 마당 한편에서 삼가헌을 눈에 담는다. 가을 햇살이 삼가헌의 기와와 대청, 마당을 한데 감싸안는다. 대들보 밑에는 '三可軒(삼가헌)'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호남의 명필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의 글씨다. 이광사를 계승하여 조선 고유의 서체를 완성한 예인으로 평가받는 창암이다. 그의 글씨가 삼가헌 대들보에 걸려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인위적인 기교가 전혀 없는 졸박한 이삼만의 서체 앞에 서니 마음이 절로 맑아진다.

또 하나의 현판이 어서 나를 보라며 말을 건다. 작은 사랑으로 들어서는 문 위에 걸린 '禮義廉恥孝悌忠信'(예의염치효제충신) 여덟 글자 현판이다. 조선 전서체의 대가 미수 허목(眉叟 許穆)의 필체는 마치 모더니스트의 타이포그래피를 보는 듯하다. 창암과 미수, 두 명필의 현판이 삼가헌의 격조를 올곧게 세우는 또 하나의 기둥이구나 싶다.

◆하엽정 못에 드리워진 마음아

삼가헌의 백미는 단연 하엽정(荷葉亭)이다. 사랑채 왼편 협문을 지나면 '연꽃잎의 정자'라는 이름처럼 자연에 둘러싸인 집이 시야에 들어온다. 박광석의 손자 규현이 1874년, 서당으로 쓰이던 파산서당(巴山書堂) ㄱ자형 건물에 누마루 한 칸을 덧대어 별당채로 지은 집, 하엽정이다.

하엽정 곁으로 천천히 다가선다. 오래 머물고 싶은 집이다. 정원은 이미 가을로 물들어 있다. 햇살이 퍼진 연못의 수면은 반짝이고, 얼마 남지 않은 붉은 백일홍이 바람에 흔들린다. 자연의 색이 스스로 번져가는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하다.

한국 전통 정원의 으뜸으로 꼽히는 이곳의 연지는 네모난 연못(方池) 가운데 둥근 섬(圓島)을 두고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이 깃든 공간이다. 하엽정의 아름다움은 손대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움에 있다. 사람의 손길이 닿아 태어난 정원이지만 그 풍경 속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다.

여름의 절정이 물러가 연꽃은 이미 사라지고, 백일홍도 자취를 감췄다. 그럼에도 외나무다리 위로 발을 딛는다. 외나무다리가 아니어도 좋다. 하엽정의 누마루에 올라도 좋다. 그래야만 천원지방의 사상이 완성된다.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 그 사이를 잇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다.

햇살은 느리게 못 속으로 스며들며 연잎 위에 부서진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둥근 하늘을 닮은 섬이 있고 그 자리에 배롱나무가 몸을 세우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수면이 하엽정의 처마를 비추고, 어우러진 수목들 사이로 가을빛이 흘러든다. 한여름의 열기를 견딘 배롱나무 가지는 연못 위로 길게 드리워져, 그림자가 물결 따라 천천히 흔들린다. 나그네의 마음 또한 물결 속에서 부드럽게 흩어진다.

하늘과 땅, 둥근 것과 모난 것이 조화를 이루는 자리에, 마침내 사람이 선다.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묘골 마을, 육신사로 향하는 길 좌우로 한옥들이 늘어서 있어 옛 정취를 더한다.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묘골 마을, 육신사로 향하는 길 좌우로 한옥들이 늘어서 있어 옛 정취를 더한다.

◆이토록 기구하고 숭고한 마을이라니

삼가헌의 안채는 비어 있지 않다. 박도덕, 정평화 부부가 그곳에 계신다.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초면의 나그네를 안채로 맞아 주시더니, 차를 내주시며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 주신다. 그간 수많은 이들이 이 집에 발을 들여 불편을 감내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인정을 베풀어 주신 부부는 대문채까지 나와 나그네를 배웅한다. 부디, 이 집이 오래도록 건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근 묘골로 향한다.

삼가헌은 본래 묘골에서 분가한 집이다. 산 하나를 넘으면 묘골이 자리한다. 삼가헌 고택을 뒤로하고 묘골에 들어서니, 황금빛 들판 위로 가을이 익는다. 잘 자란 벼들이 볕을 쬐며 바람결에 노래를 부른다.

이곳은 순천 박씨, 그중에서도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들이 터를 잡은 집성촌이다. 문득 생각이 멈춘다. 어찌하여 박팽년의 후손이 달성 묘골에 터를 잡게 되었을까.

세상이 미쳐 돌아갔다. 수양대군의 칼이 김종서와 황보인을 내리쳤고, 단종을 보필하던 고명대신들이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몰렸다. 1453년, 단종 원년의 일이다. 역사는 그날을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 기록했다.

박팽년은 더는 침묵할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의 뜻은 밀고로 꺾였고, 결국 처형된다. 자식들마저 포박되어 죽임을 당하고 며느리는 관비가 되어 고된 삶을 이어가야 했다.

다행히 하늘은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았다. 둘째 아들의 부인 성주 이씨는 그때 아이를 품고 있었다. 그녀의 친정이 바로 이곳, 묘골 마을이다. 가문이 사라질 위기 앞에서 여종이 기지를 발휘한다. 자신의 아이와 주인댁의 아이를 바꾸어 박씨 가문의 피를 지켜낸다. 여종은 딸을 낳고, 주인댁은 아들을 낳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아이가 훗날 박비(朴婢), 곧 박일산(朴壹珊)이다.

그는 열일곱이 되던 해, 세상으로 나와 신원을 밝힌다. 성종은 사연을 듣고 새 이름 박일산을 하사하며 충신의 후예임을 인정한다. 박일산은 마침내 외가인 묘골에 정착하여 순천 박씨 충정공파의 입향조가 되었으니, 기구하면서도 숭고한 후일담이다.칼날보다 강한 것은 인간의 의로움이며, 의로움보다 모진 것은 끈질긴 생명력이다. 묘골 마을이 오래 흥하기를 바라며 발길을 돌렸다.

양진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양진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양진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