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속으로] "욕심 버리고 그림을 놀이처럼…폭포 질릴 때까지 그려보고 싶어"

입력 2025-09-29 19:52:00 수정 2025-09-29 19:5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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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주 투 박동준' 김호득 초대전
7년 만의 대구 전시…폭포 신작 선보여
10월 17일까지 갤러리 분도

김호득, 폭포, 85x103cm, 광목에 먹, 2025
김호득, 폭포, 85x103cm, 광목에 먹, 2025
김호득, 폭포, 104x85cm, 광목에 먹, 2025
김호득, 폭포, 104x85cm, 광목에 먹, 2025
자신의 작품 앞에 선 김호득 작가. 이연정 기자
자신의 작품 앞에 선 김호득 작가. 이연정 기자

"요즘은 하루하루 숨 쉬며 사는 게 행복합니다. 새롭게 사는 기분이랄까요."

작가도, 작품도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다. 최근 갤러리 분도(대구 중구 동덕로 36-15)에서 만난 김호득 작가의 표정은 더없이 맑고 평화로웠다. 인터뷰 내내 그의 얘기는, 불필요한 요소들을 비워낸 자신의 작품처럼 간결하면서도 분명한 핵심을 담고 있었다.

50여 년을 이어온 그의 화업은 물 위에 떠올랐다 잠기길 반복한, 그야말로 부침(浮沈)의 연속이었다.

1985년 대학원을 졸업하던 해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획 단체전 동양화 부문에 초대돼 작품을 선보이며 주목받았고 이듬해 '현대 실험미술의 산실'로 불리던 서울 관훈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때로는 파격적인 현대 수묵화 세계를 구축하며 한때 '한국화의 이단아'로도 불렸던 그였다.

그중에서도 1997년 학고재 갤러리 전시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폭포'는 화단에 화가 김호득을 각인시킨 작품이었다. 동양의 정신에 현대적인 감각을 더한 그의 작품은 언제나 사람들의 기대를 모으고 환호를 받았다. 문제는 그의 건강이었다. 식도암 수술 등 투병생활을 반복했고, 깡마른 몸으로 교직생활과 작업을 병행했다.

2015년, 20년 넘게 몸담은 영남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한 뒤 대구를 떠나 경기도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외진 산골 속에서 그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이 아닌 새로운 예술적 지평을 열고자 부단히 고군분투했다.

그 결과 2019년 학고재에서 선보인, 강렬한 점과 선으로 축약된 수묵화 신작과 대형 설치작품은 많은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 전시가 끝난 뒤 다시 건강에 문제가 생기며 그는 한동안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작가는 "세찬 파도들이 지나고 고요한 지금, 어느 때보다 평화롭다"고 말했다. 이어 "아파서 죽음의 앞까지 가보기도 하고, 옛날을 돌이켜보며 참회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덧없다'는 말을 머리로, 마음으로 체감하고나니 지금 이 순간들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진다. 모든 욕심을 버리니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갤러리분도 전시장 전경. 이연정 기자
갤러리분도 전시장 전경. 이연정 기자
갤러리분도 전시장 전경. 이연정 기자
갤러리분도 전시장 전경. 이연정 기자
갤러리분도 전시장 전경. 이연정 기자
갤러리분도 전시장 전경. 이연정 기자

이번 전시는 작가가 2018년 이후 7년 만에 대구에서 선보이는 전시다. 몇 개의 점과 선만으로 자연과 생(生)의 기운을 담아내는, 현대 수묵화를 대표하는 그의 '폭포' 연작 10여 점을 볼 수 있다.

그는 "폭포 작품이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한동안 일부러 외면했었다"고 고백(?)했다. 여기저기서 그려달라는 주문이 쇄도하는 데도 마음 속에서는 '잘 팔리는 그림은 그리기 싫다'는 알 수 없는 자존심이 일었다는 게 그의 얘기다.

"나이가 드니 괜한 자존심이나 고집을 내려놓게 되더군요. 그걸 내려놓는 게 쉽진 않았지만, 막상 내려놓으니 훨씬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사실 폭포만큼 좋은 소재가 없어요. 이제는 폭포를 질릴 때까지 이리저리 변주하며 그려보고 싶습니다. 이제는 그림을 놀이처럼 할 수 있겠다 싶어요."

그의 작품에서는 숨이 멎을 듯 단박에 내리꽂히는 폭포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칠해진 곳보다 여백이 더 많음에도 공간을 꽉 채우는 기운이 신기할 지경. 작가는 "광목에 번진 먹의 흔적과 선 옆으로 튀겨진 물방울의 방향까지 컨트롤하는 것"이라며 "힘 조절에 따라 그림의 표정과 그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예전에는 본능만 갖고 그림을 그리려 했다면, 이제는 본능과 사고가 함께 작동하는 게 느껴진다. 최근 5년 간의 휴식기 동안 많은 후회와 반성, 새 각오가 스쳐갔고, 그것들이 겹겹이 쌓여 지금의 작품에 묻어나는 듯하다. 스스로에게 놀랄 정도"라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되새김질을 할 나이 같습니다. 예전에 했던 작업들을 뒤돌아보기도 하고, 먼 산을 쳐다보며 가볍게 산책하듯 작업하려 합니다. 내 마음에 솔직한, 욕심과 꾸밈이 없는 그림을 그려나갈겁니다."

김호득 작가는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예술고등학교, 서울대학교 회화과, 동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1970년대 대구현대미술제에 참가했으며 1986년 관훈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금호미술관, 일민미술관 등에서 37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제15회 이중섭미술상, 제4회 김수근문화상 미술상 등을 수상했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등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전시는 10월 17일까지 이어지며 일요일, 공휴일은 휴관한다. 053-426-5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