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말이 안 되면 어때요, 이렇게 아름다운데

입력 2025-09-18 11: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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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강보라 지음/ 문학동네 펴냄

백정우 영화평론가

책을 읽는 도중 작가의 나이가 궁금한 건 처음이었다. 확인한 정보에 따르면 82년생이고 등단한 지 4년 만에 펴낸 첫 소설집이었다. 그러니까 80년대 생 즉 밀레니얼 세대였다. 그래서 그랬나, 글이 곧고 투명하다. 앞선 선배 세대 소설가들이 자유분방함 속에서 질서를 인정했다면, 자기 세계에 심취한 듯 좌고우면하지 않는 당돌함이 돋보인다. 2025년 젊은작가상 수상자 강보라의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얘기다.

신춘문예 당선작 '티니안에서'를 필두로 7편의 단편을 엮은 소설집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에서 강보라의 문장은 시원하고 깔밋하다. 이를테면 수록 단편 '신시어리 유어스'의 인물들이 내포한 처세술과 독선과 견고하게 쌓아 올린 신념에 낯설어하고, 매사에 조심하는 단이 씨와 유사하다. 그러니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의 김재아처럼 자유를 꿈꾸는 실존주의자의 자기 고백으로 소설집을 채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때문인지 작가는 단편마다 분명한 스탠스를 유지하면서 직접화법으로 속내를 드러낸다. 예컨대 예술서적 전문편집자를 빌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뒤섞는 건 자기애로 똘똘 뭉친 작가가 자신감이 없을 때 쓰는 마지막 카드"라고 말하거나, 사진으로 돈을 벌고 싶다는 아마추어 사진가의 베스트 컷에 남긴 "왜 다큐 작가랍시고 이상한 환상 가진 사람들 있잖아요. 자기가 찍은 사진이 잘못된 세상을 개선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는 환상이요."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같은 코멘트는 완고한 근본주의자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세대에 관한 다양한 시선을 삽입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전 오히려 요즘 애들이 우리보다 훨씬 행복하게 산다고 느끼거든요. 아니, 행복해지는 법을 훨씬 잘 안다고 해야 하나. 소확행이 유행했던 것도 그렇고." "그건 그냥 사는 게 힘들고 허무해서 그런 거 같은데요."

1인 출판사 대표가 남은 반생을 함께하고 싶은 여자가 "다디단 설탕물을 입힌 탕후루 같은 책에만 이끌린다는 것"이 불만이면서도 자기 주변에는 "문자 하나를 보낼 때도 혹여 뒤따를지 모를 책임과 이해득실을 따지느라 십 분 넘게 핸드폰을 붙들고 있는 축축한 인간들뿐"('빙점을 만지다')이라고, 그래서 차라리 애인의 일상이 산뜻하고 투명하다고 인정하는 대목은 인상적이다.

큐레이션 매체 기자로 일하다가 소설이 쓰고 싶어 퇴사한 작가 지망생의 이야기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에서 드러나는 화자의 속마음. 그것은 문학에 발 디딘 자의 불안을 드러내는 작가의 자의식일 터다. 맞은편 작업실의 유리공예가 민홍씨가 "말이 되지 않는 걸 만들고 있는 기분이에요."라고 말했을 때 화자의 대답은 근래 만난 절창이다. 이 문장을 읽자마자 나는 노트를 펴고는 또박또박 힘주어 적었다.

"말이 안 되면 어때요. 이렇게 아름다운데."

전편에 흐르는 특유의 긴장감이 한순간 툭 하고 끊어지며 대미를 장식할 때의 아름다움. 마치 팽팽하게 질주하던 악기 소리를 일순간 멈추는 음표 코다(coda)처럼. 혹은 나른한 일상에 날아든 죽비처럼.

말을 아끼면서 독자의 판단을 기다리기보다 할 얘기를 다하겠다고 작심한 듯 기어이 쏟아낸 강보라. 그의 다음 작품이 궁금한 이유이다.

백정우 영화평론가

영화평론가 백정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