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축 재정을 추진했던 프랑스 총리가 실각했다. 그는 "젊은 세대는 오랫동안 기성세대가 쌓은 수천억 달러 부채를 지고 살아야 할 것"이라며 복지 감축 필요성을 주장했다. 여론과 야당 반발이 심해지자 그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 자신에 대한 재신임을 투표에 부친 것이다. 연설로 복지 감축의 필요성과 자신에 대한 신임을 호소했으나 결국 과반 이상의 반대표로 불신임 됐다. 이른바 '다수결'로 프랑스의 향방이 결정됐다.
이런 의사결정 방식을 프랑스 국민은 충분히 납득했을까. 민주주의 체제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방법 가운데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도구'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게 다수결이다. 다수가 지지하는 의견이 더 합리적인 거라는 믿음에 기반한 다수결 원칙은 얼핏 봐선 만능처럼 보이지만 다수결로 정한 결론은 우리를 충분히 납득 시키지 못할 때가 많다.
이럴 때 유행하는 현상이 '정치의 사법화'다. 정치 문제를 정치로 풀어내지 못하고 사법부 개입으로 해결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이를테면 국회 일이나 행정부내 권한 다툼, 정당 내 권력 개편과 같은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를 재판에 붙여 사법부 판단에 의존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번 조기 대선 당시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기소됐던 이재명 후보에 대한 사법부의 유무죄 판결이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가 됐듯 사법부 결정을 정치적 갈등의 최종 해결사로 활용하는 게 정치의 사법화다.
법률가가 시민의 의사를 대신 결정해 주는 것을 부적절한 사회현상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많지만 정치의 사법화가 갖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 바로 '반(反)다수결주의' 기능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결주의'로 대표되는 의사결정 방식은 다수집단이 소수집단을 강제하는 걸 합리화 시킨다. 프랑스 재정 문제나 연금제도 재정고갈 문제, 의료개혁 문제를 풀 때 다수결이 정답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집단이 법률을 근거로 사법부 개입을 요청한다면 다수결주의가 가진 폭력성을 저항할 수 있는 대응법이 하나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응법 역시 문제가 있다. 사법부 판단을 기다리는 동안 시민사회 공론의 장이 축소되고 개인이 본인의 판단 능력과 관계 없이 사법부의 결론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이다. 이는 대중의 의사결정 능력을 퇴화 시킨다. 게다가 사법부의 판단이 가치중립적인가에 대한 문제도 있다. 법관의 정치적 성향 또는 이해관계가 반영 될 수도 있어서다.
답은 하나다. 우리 스스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시민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인기 정치인에게 모든 것을 위임한다거나 사법부의 판단이 나오기 전까지 끊임없이 자기 주장만을 늘어놓는 행태는 사라져야 한다. 정치는 정치로 풀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중요한 판단을 대신해줄 철인 혹은 권위 있는 자의 판결을 기다리기 전에 개개인이 시민 사회에 뛰어들어 직접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수천년 전 플라톤이라는 한 현인이 한 말이 있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김찬규 프리드먼연구원 기획실장

* 가스인라이팅(Gas Enlighting)은 매일신문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칼럼 공간입니다. '가스라이팅'은 1930년대 가스등을 사용하던 시절 파생된 용어입니다. 가스등을 조금씩 어둡게 해 누군가를 통제하는 걸 의미하는데요 '가스인라이팅'은 그 반대로 등불을 더 밝게 비춰주자는 뜻입니다. 젊은이들의 시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자주 선보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