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창-윤창희] 신(新)이데올로기 전쟁: 국경 아닌 공동체를 찢다

입력 2025-09-25 10:5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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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희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수석연구원

윤창희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수석연구원
윤창희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수석연구원

최근 미국에서 보수 성향 청년 찰리 커크가 비극적인 사건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소식은 단순한 개인적 사건을 넘어 미국 사회 전체에 충격을 안겼다. 이 사건은 냉전 시대와 달리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새로운 형태의 이데올로기 갈등을 여실히 드러낸다.

과거의 갈등이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처럼 국가 간 체제 경쟁으로 나타났다면, 오늘날의 갈등은 국경을 넘어서는 대립이 아니라 각국 내부에서 종교와 이념의 균열이 심화되며 공동체 자체를 위협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이미 이런 현상은 뚜렷하다. 미국에서는 보수와 진보, 종교적 가치와 세속적 자유가 첨예하게 충돌하며 정치와 사회 전반을 양분하고 있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는 종교·종파 갈등이 내전과 폭력 사태로 이어지고, 유럽에서는 극우와 극좌의 대립이 선거와 거리 시위를 통해 표출되며 사회 통합을 흔든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선거가 다가올 때마다 정치권은 극단적 대립 구도를 의도적으로 부각시켜 표심을 결집시키려 하고, 그 결과 사회는 보수와 진보라는 이분법 속에서 더욱 날카롭게 갈라진다. 국회는 생산적인 정책 논의보다는 정쟁의 장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법안은 표류하고 민생 현안은 뒷전으로 밀려난 채, 정치적 진영 논리에 따른 대립과 발목잡기가 반복된다. 최근 몇 년간 이어진 국회 파행과 장기간의 국정 공백 사태는 국민들에게 깊은 정치 불신과 피로감을 남겼다.

이념적 갈등은 정치권에만 머물지 않는다. 언론과 온라인 공간에서 증폭된 갈등은 사회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정치적 성향에 따라 같은 사건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평행 우주' 현상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 탈원전 정책, 부동산 대책, 코로나19 방역, 최근의 검찰개혁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적 사안은 진영 대립의 구도로 변질되었고, 합리적 토론보다는 상대 진영을 향한 혐오와 배제가 앞섰다. 심지어 일상적인 인간관계나 직장 내 소통에서도 정치적 입장 차이가 불화를 불러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이념 갈등이 첨예한 이유는 역사적·구조적 요인과도 무관하지 않다. 해방 이후 남북 분단과 전쟁, 군사독재와 민주화 투쟁의 역사는 정치적 성향을 단순한 차이를 넘어 '정체성의 문제'로 각인시켰다. 그 결과 보수와 진보는 단순한 정책 노선 차이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적대적 타자로 규정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기억은 세대를 거쳐 재생산되며 한국 정치의 만성적 갈등 구조로 자리 잡았다.

이 같은 신이데올로기 갈등은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 공동체 존립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갈등이 격화될수록 경제적 손실은 물론 사회적 신뢰가 무너지고, 민주주의의 기반까지 흔들리게 된다.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 다수가 '정치적 양극화가 국가 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답했으며, 청년 세대마저 정치 불신과 냉소주의에 빠져드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대로라면 한국 사회는 갈등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너무나 분명하다. 첫째, 공론장의 회복이 절실하다. 다른 의견과 신념을 존중하고 경청하는 문화가 되살아나야 하며, 배제와 단절이 아닌 토론과 숙의를 통한 합의가 민주주의의 본질임을 되새겨야 한다. 둘째, 교육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학교와 사회 교육에서 비판적 사고와 타자 이해 능력을 길러야 하며,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민주적 소통의 기술을 체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허위 정보와 극단적 정치 선동에 대한 규제, 갈등 중재와 사회적 합의를 위한 제도적 플랫폼 마련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최근 논의되는 정치 개혁, 언론 개혁, 국회 운영 제도 개선도 이러한 맥락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냉전기의 이데올로기가 국가 간 대립을 의미했다면, 오늘날의 신이데올로기는 내부 분열을 상징한다. 이 싸움에는 승자가 없다. 오직 대화와 포용, 성숙한 제도가 공동체를 지켜낼 수 있다. 한국 사회가 겪는 첨예한 이념 갈등 또한 결국 성숙한 시민 의식과 제도적 지혜를 통해 극복해야 한다.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생존 과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