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다래나무

입력 2025-09-14 12:3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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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다래나무로 알려진 창경궁 후원의 천연기념물 다래나무는 600살이 넘는다. 덩굴 길이가 20m 줄기 굵은 부분의 둘레가 70cm가 넘는 다래나무 지존급이다. 문화유산청 제공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다래나무로 알려진 창경궁 후원의 천연기념물 다래나무는 600살이 넘는다. 덩굴 길이가 20m 줄기 굵은 부분의 둘레가 70cm가 넘는 다래나무 지존급이다. 문화유산청 제공

살어리 살어리랏다

쳥산(靑山)애 살어리랏다

멀위랑 ᄃᆞ래랑 먹고

쳥산(靑山)애 살어리랏다

얄리 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고려가요 「청산별곡」(靑山別曲)의 첫 부분이다. 청산에 들어가 머루나 다래를 따먹고 사는 '자연인'의 삶을 노래한 것인지 아니면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 청산으로 도피를 원하는 노래인지 해석의 차이는 있지만 다래가 우리 강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생 과일 중 소중한 먹거리이자 배달의 민족과 친숙한 식물이었음을 방증한다.

다래의 이름은 달다는 뜻의 'ᄃᆞᆯ'과 명사화 접사인 'ᄋᆞㅣ'가 합쳐진 말로 'ᄃᆞᆯᄋᆞㅣ>ᄃᆞ래>다ᄅᆞㅣ>다래'로 변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초가을에 약간 누런 풀색으로 익는 열매는 이름 그대로 맛이 달콤하다.

국어사전의 다래는 열매와 그 열매를 맺는 덩굴성 나무를 아우르는 말이다. 1937년 편찬된 『조선식물향명집』에는 '다래나무'로 기록돼 있지만 국립수목원의 『국가표준식물목록』엔 '나무'가 빠지고 다래로 나온다. 독자들이 헷갈리지 않고 이해하기 쉽도록 열매를 '다래'로 줄기를 '다래나무'로 구분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다래나무는 깊은 산속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서울 도심의 창경궁 후원에 있다. 1975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는데 당시 나이가 약 600살로 추정됐다.

여러 개의 굵은 줄기가 승천하는 용처럼 사방으로 길게 구불구불 뻗어 있고 상태도 괜찮다. 궁에서 터를 잡아서 인지 덩굴 길이가 20m 줄기 굵은 부분의 둘레가 70cm가 넘어 몸피도 '지존' 급이다.

높은 나뭇가지를 타고 올라가는 다래나무 줄기.
높은 나뭇가지를 타고 올라가는 다래나무 줄기.

◆다양한 쓰임에 사시사철 수난

오늘날 과일은 간식거리이지만 옛 사람들은 굶주림을 면할 중요한 양식이었다. 특히 산에 있는 다래나 머루는 주인이 따로 없으니 먼저 본 사람이 임자다. 익은 열매를 따려는 사람들이 덩굴과 가지를 꺾고 부러뜨리기 마련이다. 이런 다래의 수난이 비단 가을뿐이겠는가.

따뜻한 봄 다래의 부드러운 어린순을 데쳐서 나물로 무쳐 먹거나 삶아 말린 뒤 묵나물로 만들어 겨울이나 이듬해 봄에 먹을 요량으로 산골 사람들은 가지를 완전히 훑다시피 한다. 짐승들도 햇순을 날름 뜯어 먹어버리니 광합성을 위해 키 큰 나무의 줄기를 타고 높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곡우가 지나고 생육활동이 왕성해지면 다래나무도 수액을 뽑힌다. 거제수나무나 고로쇠나무 등 큰 나무에는 구멍을 뚫어 수액을 채취하지만 다래나무에는 줄기를 아예 통째로 잘라버린다.

용케 주변에 있는 높다란 나무를 타고 올라가 덩굴을 사방으로 뻗어 잎을 펼친 다래나무의 줄기는 생각보다 굵고 길게 자라서 둘레가 서너 뼘에 이른다. 이런 굵은 줄기를 옛사람들은 가만히 두지 않고 베어다가 계곡을 건너는 구름다리를 만드는데 썼다. 눈이 많이 오는 산간 지역에서는 가는 줄기로 눈에 발이 푹푹 빠지지 않도록 설피를 만들었다. 쓰임이 다양하니 옛날 다래나무의 수난은 계절을 가리지 않았다.

주렁주렁 달린 다래
주렁주렁 달린 다래

◆꽃 피어도 열매 없는 수 그루

깊은 산의 너덜지대나 개울가에 주로 분포하는 다래나무는 아이들 손바닥만 한 타원형의 잎 사이에 4월말부터 5월쯤 줄기와 잎자루 사이에 꽃대가 올라오고 하얀 꽃이 3∼10송이 조롱조롱 핀다. 암수가 딴 그루라서 꽃이 피지만 열매가 없는 다래나무도 있다. 매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다래는 한창 굵는다. 그 소리가 잦아들면 황갈색으로 익는다.

조선시대 철 따라 새로 난 과실(果實)이나 농산물(農產物)을 종묘에 먼저 올리는 천신(薦新)을 거행했는데 9월 제물 목록에 다래[獼猴桃]가 생기러기[生雁], 석류(石榴), 머루[山葡萄]와 함께 들어가 있을 정도다.

다래 꽃
다래 꽃

옛 선비들도 뜰에 다래나무를 심어서 꽃을 감상하고 여름에 덩굴의 그늘에서 쉬고 가을에 열매를 즐겼던 같다.

어린잎은 서리와 이슬에도 무성하고

嫩葉饒霜露·눈엽요상로

차가운 뿌리 도끼의 상처에서 벗어나

寒根免斧創·한근면부창

덩굴 멀리 뻗어가기 원하더니

要令滋蔓遠·요령자만원

긴 구름과 서로 만나 의지하네

會見倚雲長·회견의운장

여름날 그늘을 짙게 드리우더니

夏日成陰重·하일성음중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열매 향기롭네

秋風落子香·추풍락자향

다른 해엔 응당 더욱 좋아지리라고

他年應更好·타년응경호

전에 떠났던 유랑(劉郞)이 다시 찾아 달래는구려

前度說劉郞·전도세유랑

<『국간집』(菊磵集) 중권>

조선 명종 때 청백리에 뽑히고 호조판서를 지낸 윤현(尹鉉·1514∼1578)의 한시 「다래나무 덩굴을 옮겨 심고」[移種獼猴桃蔓]다. 제목의 미후도(獼猴桃)는 다래의 중국 이름이다. 다래는 감, 포도와 같은 장과(漿果)로 분류 되는데 씨를 감싸고 있는 과육에 수분이 많다. 익은 다래의 맛이 좋아서 '원숭이 복숭아'로 통용된 것일까?

조선시대에는 다래에다 꿀을 넣고 조린 미후정과(獼猴正果)를 만들어 먹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6년(1593) 8월 13일에 '제독은 미후정과 한 접시만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지원하러 왔던 명나라 이여송 장군의 귀국 길 동태를 선조께 보고한 내용이다.

개다래 열매 꽃 잎
개다래 열매 꽃 잎

◆다래나무 사촌들

우리 강산에 터를 잡은 다래나무의 사촌은 그리 흔하지 않지만 개다래와 쥐다래가 있다. 초여름 개화기에 둘 다 하얀 물감을 묻힌 것 같은 잎들이 군데군데 섞여 있어 녹음이 울창한 숲에서도 존재를 알린다. 개다래의 흰 반점은 여름 내내 그대로 있지만 쥐다래의 흰색 잎은 불그스름하게 변한다. 개다래는 개화를 알리는 방법으로 잎의 일부 색깔을 파란색 대신 하얗게 만들어 나비나 벌 등 매개 곤충의 눈에 확 띄도록 한다. 열매를 맺고 자손을 퍼뜨려야하는 그들만의 전략이다.

사람이 먹지 못하는 식물의 이름에 '개'자가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개머루나 경상도의 '개가죽'이 그렇고 개다래도 마찬가지다. 열매는 익어도 톡 쏘는 맛 때문에 동물은 입에 댈 엄두를 못 낸다. 그러나 벌레들은 개다래를 좋아한다. 다래에는 잘 없는 충영(蟲癭)이라고 부르는 벌레 혹이 많다. 알에서 깨어난 벌레가 머물며 열매를 파먹으면 다래는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고 모양이 울퉁불퉁한 기형이 된다. 한방에서는 이를 목천료자(木天蓼子)라는 약재로 쓴다.

양다래 꽃과 열매
양다래 꽃과 열매

◆키위의 원조는 중국 다래

외국에서 들어온 다래의 사촌뻘로는 키위가 있다. 다래과 집안의 후손답게 덩굴성 낙엽과수로 원산지는 중국 양쯔강 연안이지만 서양 과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까닭이 뭘까?

19세기 양쯔강 유역에 살던 서양인의 눈에 띈 덩굴나무 '차이니스 구스메리'(Chinese gooseberry)가 키위의 원조다. 열매의 톡 쏘는 맛이 너무 자극적이라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후 20세기 초 귀국하는 서양인들의 이삿짐에 실려 뉴질랜드에 조경수나 관상수로 전해졌고, 그 곳의 원예가들이 과일나무로 육종했다.

자잘한 씨앗을 씹는 재미와 시고 단 맛의 묘한 조화로 관심을 끌자 뉴질랜드는 세계시장 진출을 목표로 나무를 대량 재배하고 이름도 '키위플루트'(kiwi fruit)로 바꿔 상품화 했다. 갈색 털로 덮여 있는 열매가 뉴질랜드의 '키위' 새와 닮아서 작명에 착안했다. 중국 다래의 개량종이 아닌 뉴질랜드 키위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됐기 때문에 원산지를 서양으로 착각하는 게 어쩌면 당연하지 않았을까.

키위를 한때 '참다래'라고 부른 적이 있다. 토종다래는 '참이 아닌 가짜' 다래라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는 여론이 비등하자 양다래라고 바꿨다. 키위는 수확한 뒤 일정 기간 익혀서 먹는 후숙(後熟) 과일이다. 신맛을 좋아하면 약간 과일이 단단할 때, 달콤한 맛을 즐기려면 복숭아처럼 말랑말랑할 때 먹으면 제 맛을 느낀다.

◆다래정 이야기

18세기 조선의 지식인 이덕무가 쓴 「앙엽기2」(盎葉記二)에 다래를 한자의 음을 빌려 쓴 '炟艾'(다래)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미후도(獼猴桃)는 일명 연도(輭桃)이고 속명은 다래[達愛]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고려 신종 초년에 최충헌(崔忠獻)이 내시 민식(閔湜) 등을 축출하자고 주청할 때, 세속에서 왕이 다래정[炟艾井]-상고하건대, 다래[炟艾]는 곧 다래[達愛]와 동음(同音)이다-의 물을 마시면 내시들이 용사(用事)한다 하여 다래정을 허물어 버렸다" 하였고, 속어로 등리(籐梨)를 다래[炟艾]라 하는데 등리 두 글자는 아주 새롭다. <『청장관전서』 제55권>

고려시대 무인정권의 한 축인 최충헌은 이의민(李義旼)을 몰아내고 권력을 찬탈한 뒤 자신의 시대를 새롭게 확립하려 했다. 왕궁의 내시(內侍) 70여 명을 내쫓을 빌미를 찾던 중에 왕이 마시던 우물 '다래정'(炟艾井)에서 꼬투리를 잡았다. "왕이 이 우물물을 마시면 환관(宦官)이 권세를 부리게 되리라"는 시중의 떠도는 말을 대의명분으로 다래정을 폐쇄하고 광명사(廣明寺) 우물의 물을 마시게 했다.

꼭두각시에 불과한 왕이 마실 물조차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하던 시대의 이야기다. 역사서 『동사강목』이나 『고려사절요』에도 같은 일화가 나온다. 우물 이름을 다래나무와 연관 지으면서 그 이유는 기록에 없다. 다만 쿠데타 세력이 국정을 농단한 흑역사로 남아 있다.

전 언론인 chunghaman@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