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9월 14일 오후 4시 20분 대구 태평로1가 6-4 대구매일신문(현 매일신문) 사옥. 난데 없이 괴한 20여 명이 들이쳤습니다. 걸어 잠근 1층 공무국 문을 부수더니 직원들에 사정없이 곤봉을 휘둘렀습니다. 해머로 문선·통신·인쇄시설을 닥치는 대로 내리쳤습니다. 2층 편집국마저 절단냈습니다.
괴한들은 발송을 앞둔 신문 뭉치까지 탈취해, 타고 온 버스로 사라졌습니다. 벌건 대낮에 벌인 백주(白晝)의 테러. 단 10분 만의 일이었습니다. 지휘자는 자유당 경북도당 감찰부장 홍영섭, 국민회 경북도본부 총무차장 김민. 전날(13일) 최석채 주필이 쓴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제하 사설에 불만을 품은 보복 테러였습니다.
앞서 10일, 임병직 UN대사가 시국 강연차 대구를 방문하자 당국은 또 학생들을 불러냈습니다. 동촌 비행장에서 국립극장(구 한일극장)까지 도로변에 중·고생 수백명이 태극기를 쥐고 섰습니다. 늦더위에 도열한 지 3~4시간. 비행기는 연착했고, 학생들은 픽픽 쓰러졌습니다.
이 무렵 판문점에는 한반도에 군사력 증강을 감시할 4개국(스위스·스웨덴·체코·폴란드)대표로 구성된 중립국감시위원회가 파견됐습니다. 이 중 공산권(체코·폴란드) 감시위, 이른바 적성감위(敵性監委)를 축출(반대)하자는 관제데모가 전국을 달궜습니다. 이 데모에도 연일 학생들이 강제로 동원됐습니다. 사설은 이를 문제 삼은 것. 학도를 정치 도구화 한 '부당한 권력 남용'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신문사는 테러에 당당히 맞섰습니다. 15일 자 신문은 시설이 파괴돼 제작 불능 상태. 16일 자부터 비상제작(타블로이트판)으로 사설이 정당함을, 테러가 부당함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경북 경찰국 신상수 사찰과장은 "신문사 습격 사건은 백주(대낮)이므로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는 망언으로 테러범을 싸고 돌았습니다.
테러범은 거리를 활보했고, 최 주필은 사설 보도 나흘만에 전격 구속됐습니다. 죄명은 국가보안법 위반. 사설이 평양방송에 인용돼 빨갱이들의 사기를 높이고 적을 이롭게 했다는 것. 진상 조사에 나선 국회 조사단은 보고서에서 "테러 범행자, 치안 책임자 엄중 처단"을 요구했습니다. 최 주필은 구속 한 달 만에 풀려났지만 불구속 기소 상태로 법정 투쟁이 이어졌습니다.
"그런 사설을 안썼던들 테러 행위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 아닌가?" "그런 논법으로 한다면 그날 학도를 동원하지 않았던들 그런 사설을 쓸리 없고, 임병직 대사가 그날 대구에 오지 않았던들 그런 학생 동원이 없었을 것이니 결국 임병직 대사가 책임을 져야 된다는 이론이 안됩니까?" 법정에서 최 주필의 송곳 답변은 두고두고 화제였습니다.(매일신문 1955년 9월 13일 자~1955년 11월 9일 자)
이듬해 5월 8일, 대법원은 전원 합의로 최 주필에 무죄를 확정했습니다. 이 필화사건은 해방 후 최초의 언론탄압으로 기록됐습니다. 동시에 부당한 권력에 펜으로 맞서 승리한 언론자유수호의 시금석이 됐습니다. 5년 뒤 2·28대구학생의거, 4·19혁명으로 마침내 자유당 독재정권은 막을 내렸습니다. 그 꿈 같은 여정은 한 언론인의 대쪽 같은 펜끝에서 시작됐습니다.
필화사건을 계기로 최석채는 2000년 국제언론인협회(IPI)에서 선정한 20세기 언론자유영웅 50인에 올랐습니다. '성역 없는 보도'의 상징, 독일 '슈피겔' 발행인 루돌프 아우크슈타인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유일한 한국인이었습니다.
'백주의 테러' 발생 70년. 언론이 다시 위기에 놓였습니다. 수 십년 힘들게 닦아온 언론 광장에 페이크, 가짜뉴스가 수북히 쌓였습니다. 치우침 없이 곧게 써, 사실을 바탕으로 진실을 쫓는 불편부당(不偏不黨), 정론직필(正論直筆)은 변치 않는 언론의 사명. '언론 자유'를 넘어 '책임'과 '신뢰' 가 절실한 오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