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태 경제부 기자
'2017년 12월 안전기원제 기념'.
기념일에 받은 수건 한 장이 기억을 되살린다. 청소하다 발견한 오래된 수건이 몇 해 전 그날의 나를 떠올리게 했다.
그해 겨울 대학 졸업반에 시작한 인턴 계약 기간이 끝나자 곧바로 백수가 됐다. 고향에 내려가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다.
당시 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안전기원제'(건설 현장에서 무재해를 기원하는 행사)를 지냈다. 텅 빈 공터에 돼지머리를 얹은 고사상 앞에 사장을 대리해 현장을 총괄하는 소장부터 관리자와 숙련공, 일용직 막내인 나까지 수백 명의 인원이 한자리에 모였다. 우리가 간절하게 빌었던 하나의 소망은 단 하나 '안전'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낯선 광경에 어리둥절했던 것도 잠시. 사고로 다치는 사람이 한 명도 없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이곳에 모인 수많은 근로자들이 매일 무사히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갈 수 있기를….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 혹은 아들인 모두의 안녕을 기원했다.
해안가 벌판에 건물 14층 높이의 설비를 짓는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영하의 날씨에 차디찬 바닷바람이 더해진 쇠붙이에 의존해 작업을 했다. 꽁꽁 언 공구를 지고 사다리를 오르내릴 때면 아득한 높이에 공포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작업반장의 잔소리는 한결같았다. 다칠 것 같거나 위험하다 싶으면 나서지 말라는 것. '다치면서까지 해야 할 작업은 없다'고 반복했다. 아침 조회 구호에서 안전이 빠지는 날이 없었다. 발에 걸리는 물건이 없도록 틈틈이 자재를 정리정돈하는 것은 언제나 막내인 내 몫이었다.
봄이 올 무렵 공사가 마무리됐다. 안전기원제의 효험(效驗) 덕인지 몰라도 우리 현장은 무재해를 달성했다. 통장에 쌓인 잔고는 취업 준비 기간에 다시 바닥났지만 교훈은 남았다.
당시 인턴 계약 기간이 끝나고 오갈 데 없던 상황에 나를 받아 주는 일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현장에서 만난 인생 선배들에게 배운 점도 분명했다.
그들은 땀 흘려 번 돈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떳떳한 가장이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이들의 모습은 어린 시절 우러러보던 어른에 가까웠다. 세상 모든 일은 고귀한 가치를 지닌다. 빈말이 아니다. 모두가 소중한 무언가를 위해 치열하게 일한다.
일터를 지키는 근로자가 있기에 기업도 존재한다. 맞는 말이다.
다만 이렇게 자랑스러운 일터를 내주는 기업이 있기에, 고용과 노동이 바로 설 수 있다는 사실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고용의 주체인 기업이 없다면 노동자들은 갈 곳을 잃을 수밖에 없다.
함께하는 동료가 다치길 바라는 현장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모든 위험에 대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경제학자 모건 하우절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위험에 대비한 후에 남는 것이 리스크다. 이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최근 기업에 모든 책임을 돌리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경영상 모든 선택에 무거운 책임만을 요구한다면, 기업들은 보수적인 자세를 취할 것이 분명하다. 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해 고용을 축소하는 선택도 가능하다.
해외 이전도 타당한 대안 중 하나다. 미국을 포함한 주요국은 유망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사실상 모든 수단을 강구하고 있다. 개개인이 좋은 환경을 찾아 이민을 떠나는 것처럼 기업들도 해외 이전이라는 대안을 택할 수 있다.
기업 '엑소더스'라는 제목에 극단적이라는 비판이 뒤따른다. 나 역시 이런 극단적인 상황이 현실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댓글 많은 뉴스
국민의힘 새 대표에 장동혁…"이재명 정권 끌어내리겠다"
'박정희 동상' 소송 본격화…시민단체 "대구시, 판결 전 자진 철거하라"
송언석 "'文 혼밥외교' 뛰어넘는 홀대…한미정상회담, 역대급 참사"
장동혁 "尹면회 약속 지킬 것"…"당 분열 몰고 가는분들엔 결단 필요"
[보수 재건의 길(上)] "강한 야당이 보수 살리고, 대한민국도 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