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미술사 연구자
한 손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듯 심장에 얹었고, 펜을 쥔 다른 손으로는 무릎 위의 스케치 북에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중인 천경자의 스케치 풍 자화상이다. '아피아 시(市) 경자(鏡子)'로 서명했고, 아래의 여백에 다시 '1969. 8. 9. 서(西) 사모아 아피아 시(市) 호텔에서'라고 기록해뒀다. 사흘 전 김포공항을 떠났던 첫 해외여행의 첫 기착지인 남태평양 서사모아에서 첫날 그린 자화상이다. "호화 호텔방에서 잠을 이루지 못한 나는 거울을 보고 자화상만 그리다 하룻밤을 지내고"라고 썼던 날이다.
긴 생머리의 마흔여섯 살 천경자는 낯선 나라, 낯선 장소에서 머리에 꽃을 꽂은 화가의 모습으로 자신을 형상화했다. 커다란 꽃잎의 플루메리아, 이국적인 문양으로 온통 채워진 배경, 생기 넘치는 즉흥적 필치가 천경자의 뛰는 가슴과 열대의 온도를 전한다. 꽃에만 분홍색을 살짝 올렸다. 꽃과 여인상은 천경자 회화의 주요 주제다.
이 여행에서 천경자는 남태평양, 미국 뉴욕을 거쳐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출품하며 참석한 후 원래 목적지 프랑스 파리에 도착해 그림 공부를 하면서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여행하는 일정을 마치고 이듬해 4월 귀국한다. 유럽에 있던 10월부터 '타히티 화신(畵信)', '파리 화신' 등으로 스케치에 기행문을 곁들여 중앙일보에 30여 회 연재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른바 '천경자 기행 화문(畵文)'의 시작이었다.
날마다 뉴스가 넘쳐나는 일간지의 지면을 당당하게 차지한 천경자의 글 솜씨는 일찍부터 길러졌다. 천경자가 자신의 글쓰기를 갈고 닦았던 데는 원고료 수입이라는 동기가 있었다. 25세에 이혼한 그녀는 이후 2남2녀의 네 자녀와 부모를 부양한 여성가장이었다. 생활고로 고민 하던 천경자가 어느 날 길에서 마주친 김환기에게 한탄조로 "돈이라는 수필을 쓰고 있어요"라고 말한 것은 글이 돈이 됐던 사실 그대로였다. 천경자에게 광주로 편지를 보내 함께 일하자며 홍익대학교로 불렀던 수화(樹話) 김환기가 파리에서 돌아와 뉴욕으로 떠나기 전인 1960년대 초의 일화다. 그림은 아직 돈이 되지 않을 때였다.
천경자는 그림을 곁들여 자신의 신변 이야기를 신문, 잡지 등에 썼고 이런 글들이 모여 수필집, 화문집(畵文集), 자서전 등 20여 권의 단행본으로 나왔다. 천경자의 글은 자기 직시의 대담한 솔직함과 감수성 넘치는 문체로 독자의 공감을 받았다.
천경자는 자신의 삶을 자신의 글로 알린 글 쓰는 화가였다. 그런 능력 덕분에 천경자는 신문의 지면을 통해 다수의 독자에게 자신의 그림을 배달할 수 있었다. 탁월한 도달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미술과 접촉시켰던 것이다.
이 자화상이 56년 전인 1969년 8월의 모습이라니! 천경자는 참 앞선 여성이었다. 올해가 작고 10주기다.
대구의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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